[광화문에서/임규진]국민 여러분! 새해 기(氣) 펴세요

  • 입력 2006년 12월 26일 19시 12분


19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수그룹 본사 8층 응접실에서 한강을 내려다봤다. 김준성(86) 이수그룹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올 한 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김 명예회장의 이력서에는 대구·제일·외환은행장과 산업은행 총재, 한국은행 총재가 적혀 있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이었다. 아프리카 가나 수준의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한강을 바라보니 도도히 흐르는 물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김 명예회장은 인터뷰 내내 경제낙관론을 피력하면서도 국민의 우울증을 걱정했다. 갤럽 국제조사기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내년에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한국인은 10명 중 1명이었다. 국민이 집단우울증 증세를 보인 것이다.

“국민소득 수출 성장이 늘어날 가능성이 열려 있어요. 한국 경제는 선천적으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이렇게까지 떨어진 정권에서도 수출 실적 3000억 달러를 이뤄 냈습니다. 가망이 없을 때 우울증에 빠져야지, 가망이 있는데 왜 우울증에 걸립니까.”

김 명예회장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떠올랐다. 고도성장의 또 다른 주역인 박 명예회장은 1일 포항에서 본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국민의 사기(士氣)가 이렇게 떨어진 적은 없었어.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모든 게 나빠질 수밖에 없지. 이게 없으면 한국은 끝이야”라며 위기감을 감추지 못했다.

두 경제 원로는 무엇보다 국민의 자신감 상실을 두려워했다. 두 분이 현역으로 뛰던 19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지만 누구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 경제개발사는 영국 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1889∼1975)가 말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역사’였다. 국민은 서독에서 광원으로 일하고, 아주머니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금반지까지 모으면서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 수많은 국난(國難)을 극복해 냈다. 이를 통해 포항 모래사장에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지었고, 한강변에 고층 빌딩 숲을 이뤘다.

이런 사기충천했던 국민이 지금 다 어디로 갔느냐고 두 원로는 묻고 있는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중국 일본 등 주변국 경제가 다 좋아. 일본은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게 느껴져. 왜 우리 경제만 이렇게 나쁜가. 도대체 누가 잘못하는 거야”라고 일갈했다.

그는 본보 취재팀에 “국민이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사기 좀 높여 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인터뷰가 본보에 실린 뒤 “동아일보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표현해 줬다”며 고마워했다. 국민의 기를 살리는 데 조력(助力)했다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김 명예회장은 필자와 헤어지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믿지만 안심해선 안 된다. 국민이 힘을 합쳐 정치를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얘기는 언론에 처음으로 했다”며 자신의 뜻이 국민에게 꼭 전달되기를 소망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새해를 맞는다.

포항과 한강에서 두 경제 원로가 국민에게 보낸 ‘황금돼지해에는 기 펴세요’란 연하장이 효력을 발휘하길 기원한다.

임규진 경제부차장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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