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푸른 댓잎을 기다리며

  • 입력 2006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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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 오세훈은 알아도 우리 지역에 누가 나왔는지는 몰라요.”

“투표일요? 모르겠는데요.”

5·31지방선거 기동취재라는 이름으로 지난달 26일부터 전국을 돌아보며 만난 유권자들의 마음은 잔뜩 메말라 있었다.

첫 목적지인 대전. 대전역 근처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는 박모(38·여) 씨는 “지방자치제를 아예 없애 버려야 한다”고 역정부터 냈다. 치적을 남기겠다고 돈 들어가는 사업만 너무 많이 벌여 세금에 허덕인다는 얘기다. 첫날부터 귀가 먹먹하다.

광주 고속터미널에서 만난 50대 택시운전사.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둘 다 망가지는 거 보니까 더 진절머리가 납니다. 죽을 때까지 투표하지 않을 거요.”

공무원 신모(39) 씨는 “지난 총선 때 여당을 찍었는데 콱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손가락으로 찍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하며 웃는다.

전남 여수시. “대통령 선거도 아닌데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사실은 시장을 누구 뽑느냐가 더 중요하긴 한데….” 30대 초반의 이 회사원과는 대화가 되는 듯해 계속 물었더니 “언론도 만날 서울시장 얘기만 중계방송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다.

전남 순천시에서 경남으로 넘어가는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야트막한 언덕마다 대나무 숲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남도의 봄 풍광을 어지럽혔다. 이때쯤이면 연녹색 이파리를 살랑거리고 있어야 하는데 지난겨울의 폭설과 한파 탓이란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경남 김해시. 일부러 그가 태어난 진영읍을 찾았다. 6명을 만났는데 다들 냉랭하다. 회사원 유모(57) 씨는 “노 대통령이 당선되고 기분 좋아하던 동네 형님들이 요즘에는 ‘어디 가서 진영 산다고 말하기 부끄럽다’고 한다. 경제가 나아진다는 말만 많고 되는 일이 없지 않으냐”며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렇지만 과일 행상을 하는 60대 아주머니는 “그래도 고향 사람 밀어줘야죠”라며 끼어든다.

마지막으로 찾은 경북 경주시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난해 주민투표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에 성공한 이곳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생기가 돈다. “방폐장 유치 이후에 자고 나면 집값, 땅값이 올랐다는 얘기로 화제가 바뀌었다”고들 한다.

지역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이번 취재는 ‘민생이 민심을 좌우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 올해 1월 “선거일까지 두 달 반 동안 절대로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공약을 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가 떠올랐다. 그는 공약을 남발했다는 비판에 시달리다가 최근 총선에서 좌파연합에 패했다.

매니페스토(참공약 선택하기)로 따지자면 ‘노 섹스’ 공약은 그와 그의 부인만이 알 수 있는 검증이 불가능한 불량 공약이었다.

이런 다짐은 어떨까. “선거일까지 절대로 싸우지 않고, 엉터리 공약 내놓지 않고, 돈 뿌리지 않겠다.”

남도의 대나무 숲은 고사(枯死)한 것이 아니어서 이달 중순이면 새순이 돋는다고 한다. 얼마 안 있으면 고사한 댓잎처럼 우수수 떨어질 지방정치인들도 있겠지만 선거일까지만이라도 메마른 유권자의 가슴에 새순이 돋도록 노력하는 정치인들을 기대해 본다.

김정훈 정치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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