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형인]하인스 워드가 한국서 자랐다면

  • 입력 2006년 2월 10일 0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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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의 프로풋볼 스타가 된 하인스 워드의 신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우리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혼혈로 태어나 이산가족이 되어 아빠와 엄마 집을 두루 거치며 자란 그가 어떻게 4년간 260여억 원을 받는 스타로 변신했을까. 그는 풋볼필드에서 26년 패배의 쓰라림을 안고 있던 피츠버그 시민의 울분을 날려 버리며 전 미국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워드가 올봄에는 서울에 당당히 입성한단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출신 고교에 장학금을 주어 왔던 워드는 대학에 어머니 이름을 딴 ‘김영희 장학금’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단순한 근육질의 고연봉 스포츠 스타를 넘어서서 사회봉사의식을 내면화한 진정한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스틸러스 구단과의 계약 시 보여 준 그의 인내와 끈기, 화합의 투지는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테럴 오언스와 비교되면서 한층 빛난다.

그의 사례는 또한 인종 문제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포용력을 보여 준다. 그것은 건강성과 개방성이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성공 스토리쯤은 만들어 낼 역량이 있는 곳이다.

한번 자문해 보자. “그가 만일 한국에서 컸어도 이렇게 환히 자랄 수 있었을까?” 대답은 “노”에 가까울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혼혈인에 대해, 국제결혼에 대해, 그것도 흑인과의 교류에 대해서 지나치게 폐쇄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배달겨레로 똘똘 뭉친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에 더해 6·25전쟁의 아픔을 혼혈인들이 되새겨 주기 때문일까. 지금은 세계화 시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거론되며 우리 경제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기여가 없이는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해졌으나 외국인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워드의 어머니는 워드가 고교 시절에 한국계 학생들과 친선 야구경기를 했을 때 한국 학생들이 경기 후 회식에 그를 달랑 빼놓아서, “다시는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잊고 싶은 추억일 게다. 우리 식의 ‘끼리끼리’ 문화는 태평양 건너 저쪽에서도 무의식중에 나타났나 보다.

미국에서 인종주의가 퇴조하는 계기는 놀랍게도 미국에 밀어닥친 세계화의 물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많은 독립국이 탄생했고 이들 나라의 외교관들은 워싱턴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는 국빈 대우를 받았지만 일단 워싱턴 경계를 벗어나면 사정이 달랐다. 특히 미국 남부의 경찰들은 미국 흑인 다루듯 그들을 대했다. 고속도로 대합실, 화장실, 호텔의 백인 전용 시설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항의가 백악관과 국무부로 빗발쳤다. 미국은 특히 소련과의 대결 구도에서 인종문제를 더는 남부의 지역적 사안으로만 맡겨 둘 수 없었다.

1960년대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주도한 민권운동이 확산되면서 학교 등 공공기관과 시설에서의 인종 평등과 통합이 법적으로 이루어졌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이 있었지만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100년이 지난 후에야 극복됐던 것이다.

다문화주의와 함께 다양한 미국인을 응집시키는 또 하나의 국가적 이상이 있다. 그것은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국가라는 신념이다. 구체적으로는 기회 균등이다. 워드의 어머니도 ‘미국에서는 부지런히 일만 하면 살 수 있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우리도 한국에 있는 혼혈인들을 그렇게 밝고 환하게 키워 낼 수 있을까? 그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직 그곳은 진정 열린사회가 아니다.

김형인 외국어대 교수·미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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