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삼성 채권 800억 원의 후유증

  • 입력 2006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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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의 야코브 스벤손 박사가 수출입 관련 부패를 연구하기 위해 태국의 어느 성공한 기업인을 인터뷰했다. 그 기업인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세관원이 되고 말거요.” 부유한 기업가가 박봉의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말에 스벤손 박사는 부패의 심각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 기업인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역시 부패의 수혜자다. 대부분의 뇌물 수수는 ‘자발적’ 거래다. 자발적 거래는 거래 당사자 모두가 이득을 볼 때만 이뤄진다. 따라서 뇌물을 주는 쪽 역시 현실에 대해 분노할지는 몰라도 뇌물을 받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처럼 부패를 폭로할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 그래서 부패사건 수사가 어려운 것이다.

재작년 대검 중앙수사부의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한나라당을 부패 정당으로 낙인찍히게 만들면서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을 뒤바꿔 놓았다. 그때 삼성 채권 약 800억 원에 대한 수사에서 밝혀진 약 300억 원 외에 ‘수수께끼’로 남았던 약 500억 원의 행방이 최근 밝혀졌다. 중수부는 지난해 12월 중순 500억 원 가운데 추가로 밝혀진 불법 대선자금과 삼성 퇴직 임원 격려금 등 60억 원을 제외한 440억 원을 삼성 측이 보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싱겁게 수사를 종결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1년 반 전 ‘국민검사’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은 왜 440억 원에 대해 밝히지 못하고 내사 중지해야 했을까? 삼성은 왜 그때는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제야 실토했을까?

미궁 속으로 빠져들 뻔했던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수사 종결 며칠 뒤에 잡혔다. 한나라당이 받은 것으로 추가로 밝혀진 25억 원에 대해 삼성 관계자가 한나라당 관계자에게 ‘이 부분(25억 원어치 채권)을 갖고 있다면 다른 안전한 것으로 줄 테니까 우리한테 내놔라. 그러면 없는 것이 된다’는 식의 제의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만약 한나라당이 삼성의 돈세탁 제의에 응했다면 삼성이 보관 중인 채권은 440억 원에서 25억 원이 늘어난 465억 원이 됐을 것이다. 이제 440억 원에 대한 퍼즐 조각들이 차례차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노무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삼성 관계자의 해외 도피→내사 중지→1년 반의 시간→돈세탁…→수사 종결.

수사 종결로 삼성은 부패 정치인들만큼이나 홀가분한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사 종결을 위한 삼성의 노력이 한국호(號)의 방향타를 좌측으로 돌리는 데 기여했다면 삼성은 앞으로 오랜 세월 그 후유증으로 고생할 것이다.

효율적 자원 배분이라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승자와 패자를 뒤바꾸는 부패가 가장 나쁜 부패다. 안 부장의 대선자금 수사는 그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부패에 관해 승자와 패자를 뒤바꿨을 개연성이 크다. ‘차떼기 당’으로 낙인찍힌 한나라당은 다수당에서 제2당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국민과 기업들에 돌아온 것은 반(反)기업 정서와 반시장적 정책들이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신문법과 공정거래법에 이어 사립학교법을 개정했다. 이로 인해 시장경제제도의 근간이 되는 사유재산권이 위협받고 있다. 삼성은 우리나라 시장경제제도의 최대 수혜자다. 그런 삼성이 시장경제제도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위해를 가하는 데 일조했다면 그것은 분명 아이러니다.

하지만 어쩌랴.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일찍이 개탄했던 것처럼 ‘기업가들은 권력과 타협할 기회가 생기면 바로 타협하고 항복할 기회가 생기면 즉시 항복하는 사람들’인 것을.

부패는 국민을 분노케 한다. 분노로 판단력이 흐려지면 드러난 부패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삼성 채권 800억 원의 진실을 냉철히 살피지 못하고 물밑에 숨어 있는 거대한 부분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부패에 분노한 우리 국민은 좌파 정당의 득세를 허용했고, 그 결과 시장경제제도의 후퇴와 성장률 하락으로 고통받고 있다.

국민이 현명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경제제도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경제학 ig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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