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일]현대판 검투사들

  • 입력 2006년 1월 3일 03시 03분


코멘트
극한의 묘기로 보는 이들에게 짜릿함을 안겨 주는 ‘익스트림(extreme) 스포츠’. 자전거 스턴트, 스포츠클라이밍, 번지점프, 웨이크보드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에는 늘 부상의 위험이 따라다니지만 로마 때의 스포츠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로마제국에는 최대 30만 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이 250개 이상 있었고 이곳에서 로마 시민들을 열광시킨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검투(劍鬪)경기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갈리아 등에서 잡혀 온 노예와 죄수들이 목숨을 걸고 칼싸움을 벌여야 했다.

피가 튀는 살육의 스포츠였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관중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새롭게 추가된 종목이 검투사와 맹수 간의 대결이었다. ‘검투사’를 뜻하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사자 호랑이 표범 곰 등 맹수를 며칠씩 굶겼다가 경기장에 풀어 놓고 칼을 든 검투사와 대결을 시켰으니 매번 피의 잔치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맹수를 잡아 수송을 전담하는 관리까지 있었고 맹수들이 남획되면서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사자 호랑이 등이 멸종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현대판 검투사라고 하면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킥복싱, 쿵후, 가라테를 비롯해 각종 무술의 고수들이 일대일 맞대결로 ‘싸움에서 최고의 강자는 누구일까’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면서 인기 스포츠로 급부상했다.

이종격투기에서도 선 채 경기를 하는 K-1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프라이드(Pride) FC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속행하기 때문에 누워 있는 선수의 안면을 무릎으로 가격해 얼굴뼈가 바스러지고 팔과 다리, 허리가 부러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팔각형 철조망 안에서 글러브도 끼지 않고 거의 모든 공격을 허용하는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는 격투기의 극한을 보여 준다.

한국 씨름의 천하장사 출신으로 K-1 무대에 진출한 최홍만은 지난 한 해 누리꾼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스포츠 스타 순위에서 1, 2위를 오르내렸다. 최홍만은 218cm, 158kg의 육중한 몸집에 순발력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복싱 기술까지 연마해 데뷔한 지 1년도 채 안 돼 이종격투기의 스타로 떠올랐다.

올해 국내 스포츠팬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뉴스가 ‘한국 축구의 월드컵 4강 신화 재현’과 ‘최홍만의 K-1 챔피언 등극’이라고 하니 최홍만이 팬들의 성원에 부응하려면 더 강한 힘과 기술로 상대를 확실하게 때려눕혀야 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기번은 1787년 발간한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로마제국 쇠퇴의 5가지 현상으로 이혼율과 세금의 증가, 대규모의 군사력 증강, 종교의 타락과 함께 스포츠가 점점 잔인해졌다는 점을 꼽았다. 놀라운 것은 이 다섯 가지 현상이 현대에도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올해는 축구와 야구월드컵이 열리는 해다. 둥그런 공의 잔치가 열리는 해인 만큼 스포츠에서만이라도 과격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잔인함보다는 아름다움이 박수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권순일 스포츠레저부장 stt77@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