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32>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2월 7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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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저렇게 허물어져 내리는 장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윽고 패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팽성에 있는 계포에게 사람을 보내 군량과 말먹이 풀을 재촉하면서도, 그저 빨리 봄이 가고 밀이라도 익어 군사들이 추위와 배고픔에서 놓여나게 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미처 그 봄이 다하기도 전에 패왕의 허파를 뒤집는 듯한 소식이 들어왔다.

“한왕이 장량을 임치로 보내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세웠습니다. 한왕이 옥새와 백관의 인수(印綬)에다 성대한 의장(儀仗)까지 내려보내 한신의 즉위에 격식과 위엄을 갖춰 주었다고 합니다.”

“무어라? 유방 제놈이 무엇이건대 또 함부로 왕을 봉한단 말이냐? 아무데나 왕이란 글자만 새겨 넣으면 옥새란 말이냐? 아무렇게나 용상을 깎아 개나 소나 그 위에 앉히기만 하면 왕이란 말이냐?”

그러지 않아도 몇 달 전 장이를 조왕(趙王)에 세운 일로 한왕 유방을 별러 오던 패왕이었다. 그 전해 여름인가 이미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는 소문은 돌았으나 패왕은 그저 말로만 그리 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해 동짓달 한왕은 서(西)광무에서 궁색하게 몰리고 있으면서도, 멀리 장이에게 뒤늦게 옥새와 의장을 내려보내 보란 듯이 조왕에 즉위시켰다. 그 방자함만으로도 한왕 유방을 죽일 죄목이 하나 늘었는데, 이제 다시 제멋대로 한신을 제왕에 올려 앉혔다니 그냥 둘 수 없었다.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내 반드시 유방을 사로잡아 이 방자한 죄를 묻겠다!”

그렇게 소리치며 좌우를 몰아대는데 군막 바깥에서 호위하던 낭중이 들어와 알렸다.

“무섭(武涉)이라는 막빈(幕賓) 한 사람이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이름은 귀에 익지만 얼른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막빈이었다. 범증이 죽은 뒤로는 책사(策士)를 믿고 쓰지 않는 패왕이라, 그저 식객(食客)처럼 군중(軍中)을 따라다니는 무리 가운데 하나인 듯했다.

“무슨 일이라더냐?”

패왕이 별로 탐탁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낭중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제나라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새로 제왕이 된 한신에 관해 아뢸 일이 있다고….”

그 말에 패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온몸이 후끈하며 울화부터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화만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억지로 화를 누르며 무섭을 불러들이게 했다.

“네가 한신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그랬느냐?”

무섭이 군막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패왕이 꾸짖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무섭이 별로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꿋꿋함이 패왕에게 알 수 없는 기대를 품게 해 험악한 얼굴 표정부터 풀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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