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팩토리’ 이어 ‘다크 실험실’ AI·로봇이 신약 연구 효율 5배 높였다

  • 동아일보

AI가 설계한 화학 연구, 로봇이 수행
세계 20대 제약사 중 17곳과 협업
AI 상용화 선도하는 中 남부 선전시
산업용 로봇 사면 비용 50% 지원

지난달 11일 방문한 중국 선전시의 AI 기반 신약 개발 업체 ‘엑스탈파이’ 본사에 스스로 화학 분자 실험을 수행하는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이 100여대 설치돼 있다. 엑스탈파이 제공
지난달 11일 방문한 중국 선전시의 AI 기반 신약 개발 업체 ‘엑스탈파이’ 본사에 스스로 화학 분자 실험을 수행하는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이 100여대 설치돼 있다. 엑스탈파이 제공

“이 연구실 안에는 인공지능(AI)과 로봇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달 11일 중국 광둥성 선전시의 AI 기반 신약 개발 업체 ‘엑스탈파이(XTalPI)’ 본사. 보안구역 내 독립된 공간에는 면적 2.5㎡의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 100대가 줄지어 설치돼 있었다. 그 안에서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로봇 팔이 AI가 설계한 공식에 따라 각종 화학 실험을 이어갔다. 워크스테이션 사이로 자율주행로봇(AGV)이 지나다니며 실험이 끝난 샘플을 옮겨 담았다. 사람 없이 AI가 공장을 운영하는 ‘다크 팩토리’처럼 AI가 실험을 설계하고, 로봇이 실행하는 ‘다크 실험실’의 모습이 국내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홍콩과 마주하고 있는 중국 남부의 선전시는 대표적인 첨단 제조의 중심지다. 텐센트, 화웨이, 비야디(BYD) 등 글로벌 기업들의 본사가 즐비하다. 최근에는 산업 현장과 일상생활 전반에 AI를 접목시키는 ‘AI 상용화’에 가장 앞선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화학연구 분야의 엑스탈파이를 비롯해 대표적인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 유비테크, 자율주행을 선도하는 로보센스도 선전에 본사를 두고 있다. 5일 리창(李强) 국무원 총리가 전국인민대표회의 업무보고에서 중점 산업에서 AI를 통한 상용화와 규모화를 강조하면서 선전시와 이곳의 기업들은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11일 중국 선전시의 엑스탈파이 본사. 보안 구역 안에  있는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의 모습이 국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선전=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지난달 11일 중국 선전시의 엑스탈파이 본사. 보안 구역 안에 있는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의 모습이 국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선전=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 AI·로봇 투입하니 신약 개발 효율 5배 높아져

“다들 처음에는 바이오나 제약회사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AI와 로봇으로 화학 연구를 하는 기술 플랫폼 기업입니다.”

엑스탈파이의 허메이 박사는 회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회사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 출신 3명이 2014년 공동으로 창업했다. 이들의 전공은 각각 양자 물리, 양자 화학, 수학, 물리학 등이다.

엑스탈파이가 신약 개발 회사로 잘 알려진 건 글로벌 제약회사인 화이자와의 인연 때문이다. 사업 초기 화이자가 개최한 화학 분자 구조 예측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엑스탈파이의 실력을 인정한 화이자가 이들의 첫 번째 고객이 된 것. 지금은 세계 20대 제약사 중 17곳이 엑스탈파이와 협업 중이다. 화이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만들 당시 엑스탈파이와의 협업을 통해 AI 기술을 실험에 대거 적용했다. 그 결과 수개월 걸리는 연구를 6주 만에 끝냈다. 한국 회사 가운데 대웅제약, JW중외제약 등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초기 신약 개발 단계가 어려운 건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몸속의 표적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 표적에 잘 들어맞을 ‘분자 물질’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 기존에는 연구원들이 수백 개의 가설을 세우고, 수천 번의 실험을 통해 적합한 물질을 찾아야 했다. 엑스탈파이는 이 과정에 AI를 도입해 실험해야 할 경우의 수를 크게 줄였다. 실험 이후 결과 데이터가 나오면 다시 AI 알고리즘에 반영하는 과정을 거치며 완성도를 더 높였다.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 안에 있는 로봇팔은 24시간 동안 한 치의 오차 없이 재료를 섞고, 걸러내며 실험을 진행한다. 엑스탈파이 제공
자동화 로봇 워크스테이션 안에 있는 로봇팔은 24시간 동안 한 치의 오차 없이 재료를 섞고, 걸러내며 실험을 진행한다. 엑스탈파이 제공

엑스탈파이는 2019년부터 로봇을 통한 실험 자동화를 추진했다. 로봇은 카메라와 센서로 워크스테이션 내 상황을 확인하고 시험관에 재료를 넣고, 섞고, 걸러내는 등의 복잡한 작업을 인간의 개입 없이 수행한다. AI가 제시해 준 실험 설계도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험을 진행할 수 있으니 결과 데이터의 양과 신뢰도가 높아졌다. AI가 단순히 스마트폰이나 PC 속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실제 연구와 산업 현장의 생산력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신약을 만드는 화학 실험의 80% 이상을 로봇이 해내고 있어요. 24시간씩 주 7일을 일하며 실수도 없죠. 실험 효율은 5배 이상 빨라졌고, 데이터는 40배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태양광 전지, 배터리 전해질, 슈퍼 농작물을 만드는 기업들과도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전, 피지컬AI 앞장서는 기업 즐비

선전시 바오안구에서 국도 107호선을 따라 약 10km 구간은 ‘로봇 밸리’로 불린다. 유비테크와 두봇 등 중국 본토와 홍콩 증시에 상장된 업체를 비롯해 200여 로봇 제조사가 밀집해 있다. 감속기, 모터, 컨트롤러 같은 로봇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회사까지 포함하면 800여 개에 달한다. 남방과학기술대학, 칭화대 선전국제대학원 등 대학과 연구기관까지 들어서 중국 로봇 공급망의 핵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선전의 휴머노이드로봇 제조업체인 유비테크의 산업용 로봇‘워커 S2’는 이미 중국의 자동차 업체 지커와 BYD 등의 공장에 투입됐다. 유비테크 제공
선전의 휴머노이드로봇 제조업체인 유비테크의 산업용 로봇‘워커 S2’는 이미 중국의 자동차 업체 지커와 BYD 등의 공장에 투입됐다. 유비테크 제공

유비테크는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업체 중 상용화에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S2 유비테크의 최신형 로봇 ‘워커 S2’는 출시 단계부터 산업용 휴머노이드 로봇을 표방했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스스로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는 기술이 적용됐다. 사람이 주기적으로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충전시켜 주지 않아도 24시간 내내 멈추지 않고 공장에서 작업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중국 자동차업체 지커의 저장성 지역 공장에서 진행한 실전 테스트를 시작으로 니오, 둥펑 등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공장에도 투입되고 있다.
선전시에 본사를 둔 라이다(LIDAR) 센서 기업인 로보센스 역시 피지컬AI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회사다. 라이다 센서는 주변에 레이저를 쏘아서 사물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술이다. AI가 로봇의 두뇌에 해당한다면, 라이다는 눈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자율주행차는 물론 공장 자동화 시스템, 로봇 등에 필수적 요소가 됐다.

●휴머노이드 로봇 도입 기업에 비용 50% 지원

선전시는 베이징, 상하이, 항저우 등과 함께 AI, 로봇 산업의 중심지로 꼽힌다. 베이징은 칭화대를 중심으로 한 뛰어난 인재와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AI 원천 기술 개발에 강점이 있다. 상하이는 반도체 등 제조 시설과 금융 인프라가 갖춰진 생산의 거점이다. 반면 선전은 AI 기술 개발을 넘어 실제 산업과 서비스에 적용하는 상용화에 초점을 맞췄다.

1월 리창(李强) 중국 국무원 총리는 올해 첫 지방 일정으로 선전시를 찾았다. 리 총리는 엑스탈파이 본사를 둘러본 뒤 유비테크, 로보센스 등 중국 대표 로봇 기업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리 총리는 “로봇과 드론 등 신기술 제품들을 광범위하게 보급해야 한다”면서 “제품의 성능 향상에 속도를 내려면 실제 적용 분야를 확대하고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전시도 적극적인 지원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초 발표한 인공지능 선도 관련 계획에 따르면 AI를 활용한 PC,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 로봇 등을 출시하면 최대 300만 위안(약 6억4000만 원)을 지원한다. AI 모델을 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은 최대 1000만 위안(약 21억2000만 원)까지 시에서 보조해 준다.

제품 공급자뿐 아니라 수요자에 대한 지원도 있다. 기업이 자신들의 업무에 활용하기 위해 AI 모델을 구입하거나 AI에이전트 시스템을 구축할 경우 최대 200만 위안(약 4억2000만 원)까지 보조금을 준다. 또 중소기업이 산업용 로봇이나 휴머노이드 로봇을 구매할 경우 비용의 50%(연간 최대 100만 위안)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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