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5년 中마오쩌둥 대장정 완료

  • 입력 2005년 10월 2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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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0월 20일 중국 현대사를 바꾼 긴 행군이 마무리됐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일명 홍군·紅軍)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누르고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 행군의 이름은 바로 대장정(大長征·Long March). 중국 동부의 장시(江西) 성 루이진(瑞金)부터 서부의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까지, 무려 1만2500km에 이르는 행로였다.

대장정이 시작된 것은 1934년 10월 15일. 당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장제스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1933년 장제스는 70만 대군을 동원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루이진의 공산당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그 엄청난 공격 앞에서 공산당은 궤멸 직전에 이르렀다.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오쩌둥은 생존을 위해 탈주를 선택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추스른 병력은 8만5000명의 전투원, 1만5000명의 후방요원, 여성 35명 등 10만여 명. 이들은 포위망이 허술한 남서쪽을 뚫기 시작했다.

대장정은 처절했다.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고 11개의 성(省)을 지나야 했다. 대장정 기간 내내 매일 평균 한 차례씩 국민당 군대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30km를 행군한 다음에야 비로소 한 번씩 휴식을 취했다. 열흘 이상 풀뿌리만 먹기도 했고 맨발로 차가운 설산(雪山)을 넘기도 했다. 그 힘겨운 장정을 끝내고 옌안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불과 8000여 명.

그러나 대장정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병력은 12분의 1로 줄었지만 공산당 이데올로기를 중국 전역에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면 그들은 점령한 마을에서 매일매일 선전 집회를 열었고 연극을 공연했다. 그리고 항일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장정의 당위성을 알려나갔다. 대장정 기간에 만난 사람은 무려 2억여 명. 중국 대륙은 그렇게 붉게 물들어갔다.

그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중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든 대장정.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빼놓고 중국의 현대사를 논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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