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85>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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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동문 쪽을 에워싸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급히 창칼을 집어 들고 맞섰으나 적병이 워낙 갑작스레 치고나온 터라 잘 막아내지 못했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적병의 날카로운 기세에 밀려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때 패왕은 성벽 다른 쪽의 군막에서 새벽잠에 빠져 있었다. 성안에서 적병들이 뛰쳐나왔다는 말을 듣고 동문 쪽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적병이 길을 앗아 달아난 뒤였다.

“적이 얼마나 되었느냐?”

“많아야 삼천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잠깐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패왕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모두 깨워라. 어서 성문을 깨뜨리고 성벽을 넘어라. 적의 주력은 이미 달아났다.”

그때 갑자기 성벽 안이 수런거리며 성문이 절로 열렸다. 초나라 군사들이 창칼을 다잡으며 바라보니 이번에 성문을 나오는 것은 늙은이와 아녀자들을 앞세운 성안 백성들과 몇몇 현리(縣吏)들이었다.

“외황 현령 장(張) 아무개가 성문을 열고 대왕을 맞아들입니다. 죄 없는 창맹(蒼氓)들을 가엾게 여겨 거두어 주옵소서.”

현리들 가운데 앞서 있던 늙은이가 패왕의 말 아래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빌었다. 머리칼이 허연 노인이 찬 땅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항복을 비는 모습이 자못 애절했으나 패왕에게서 터져 나온 것은 벽력같은 호통이었다.

“이놈들 어디서 과인을 속이려 드느냐? 네놈들은 어제까지 팽월의 졸개들을 도와 과인에게 맞서다가, 그것들이 모두 성을 빠져나가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그래놓고 간사한 낯짝과 애절한 눈물로 빈다고 너희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느냐?”

그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이것들을 모두 끌고 가 한곳에 몰아두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열다섯 살이 넘는 남자는 모조리 끌어내 오너라. 오늘 이것들을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어 과인의 군령이 엄함을 천하에 보여 주려 한다.”

갑작스러운 강습을 받은 탓에 많지 않은 적에게 밀려 길을 열어 주고만 초나라 장졸들도 심사가 뒤틀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두말없이 성안으로 뛰어들어 열다섯 살이 넘는 남자는 모조리 잡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이제 막 밝아오는 외황성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성안으로 뛰어든 초나라 군사들은 남자 꼴을 하고 있으면 코흘리개 어린아이를 빼고는 모조리 창칼로 마소 몰 듯 몰아 동문 밖으로 끌어냈다. 무섭게 덮쳐 오는 초나라 군사들을 보고 얼결에 달아나다 죽거나 다친 백성도 많았다.

해뜰 무렵이 되자 삼만이 넘는 외황성의 남자들이 모두 동문 밖으로 끌려나와 두려움과 추위에 떨며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것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라!”

패왕이 그들을 버러지 떼 보듯 하며 다시 장졸들에게 놋그릇 깨지는 소리로 외쳤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들에게 괭이와 삽 따위를 던져 주며 무자비한 매질로 구덩이를 파게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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