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2>시금치도 안 먹어

  • 입력 2005년 9월 13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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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주부 서경자(가명·48) 씨는 명절 때면 시댁 식구들의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 칭찬이 징그럽게 싫다.

서 씨는 둘째며느리다. 약사인 큰며느리는 늘 바쁘다. 명절 때 시댁에도 늦게 오고 제사 음식을 함께 만드는 경우도 적다. 심지어 지난 설에는 아침만 먹고는 일이 있다면서 바로 가버리기도 했다. 그런 동서를 보고도 시댁 어른들이 아무 말도 않는 게 더욱 속상하다.

명절 준비는 오롯이 서 씨의 몫이다. 하루 종일 전 부치고 고기 굽고 있으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나?’라는 의구심이 든다. “둘째며느리 잘한다는 칭찬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준비하라’는 말로 들린다”는 것이다.》

언젠가 “시댁도, 형님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남편에게 따진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던진 농담. “뭘 화를 내고 그래? 가정주부에서 ‘주’자 빼면 가정부 아냐?” 서씨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정말 가정부가 아닐까?’

외며느리인 김성희(가명·43) 씨는 추석 연휴가 짧은 올해 일찌감치 친정행을 포기했으면서도 지난해 추석 때 시어머니가 한 일을 생각하면 속이 끓어오른다. 그동안 시어머니는 연휴가 짧으면 당신 아들 힘들다는 핑계로 친정행 포기를 종용했다.

모처럼 명절 연휴가 길었던 지난해 연휴 마지막 날 설거지를 마치고 뒷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시어머니는 갑자기 “친정에 가서 귀찮게 하지 말고 점심 먹고 가라”며 부엌에 들어가 국수를 삶기 시작했다. 김 씨는 “저녁 늦게 도착한 친정에서 머무른 시간은 1시간도 안 된다”며 씁쓸해했다.

중년의 주부에게도 명절은 부담이다. 신혼 시절에는 시댁에서 처음 맞는 명절에 음식 장만하랴 몸은 힘들고 친정 생각은 간절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10년, 20년째 명절마다 시댁을 찾지만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는 스트레스가 작아지기는커녕 날로 커져만 간다.

최근 명절을 앞두고 한 중형 병원이 주부 3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3.1%가 ‘명절증후군’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명절증후군이란 추석 설날을 지낸 후에 어깨통증, 요통이나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시댁과의 갈등, 과도한 음식 준비 등이 원인으로 꼽혔다.

김영주(가명·51) 씨도 명절 저녁이면 신경이 곤두선다. 저녁에는 시누이 가족이 ‘친정’을 찾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친정에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당신 딸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남의 집 며느리이기도 한 시누이는 와서도 수고했다는 말은 없고 나이 드신 친정어머니 걱정만 한다. 김 씨는 친정이 지방이라 명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이제껏 위로 한 번 한 적 없다.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은 주부가 많다. 오죽 시댁 문제로 속이 끓으면 ‘시’자 들어간다고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고 할까.

손승영(孫承暎·여성학) 동덕여대 교수는 “가부장적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가족일수록 주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게 된다”고 말한다.

맏며느리인 박현숙(가명·55) 씨는 명절보다는 한 해에 몇 차례 있는 제사가 부담거리다. 박 씨는 시아버지 제사를 벌써 29년째 맡아 하고 있다. 10여 명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박 씨는 “제사 준비만 하라면 까짓거 무슨 문제냐”고 말했다. 제사가 끝난 후에도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이어진다. 시어머니는 돌아가는 자식들 챙기느라 경황이 없다. 박 씨에게 “뭐해?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야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으면 “맏며느리 역할도 못 한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정은혜(가명·43) 씨는 시댁에 안부 전화할 때마다 가슴이 졸아든다. 정 씨의 남편은 시아버지와 함께 중소기업을 경영한다. 남편은 늘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온다. 대화도 거의 단절된 상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정 씨에게 “남편이 편안해야 집안이 잘 된다”고 가르친다. 가끔 억울한 감정을 드러내려 하면 시어머니는 “우리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며 크게 혼을 낸다.

그런 정 씨가 친정을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끔 남편에게 “친정어머니 용돈 좀 드리자”고 하면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퉁바리를 놓는다. “남편은 아직도 시부모의 아들일 뿐, 내 남편이 아닌 것 같아요.”

같은 여자이면서 시댁 식구로 ‘군림’하는 시누이들과의 갈등도 문제다. 최정미(가명·47) 씨는 뇌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병 수발을 들고 있다. 대소변도 받아내고 매일 죽도 떠먹여 드리기를 3년째. 몸도 마음도 지쳐 가는데 얼마 전 간병을 제대로 못한다고 손위 시누이들이 흉보는 걸 듣고는 기가 막혔다.

최 씨는 “우리 엄마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는 시누이들이지만 자신들이 간병하겠다는 얘기는 죽어도 안 꺼낸다. 자기들은 누군가의 며느리 아닌가? 며느리 심정과 고생을 그렇게 몰라주는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朴容千) 교수는 “평소 자잘했던 시댁과의 갈등은 명절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를 계기로 악화된다”면서 “남편이 아내의 친정을 걱정해 주고 수고를 위로해 주는 게 갈등 완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유영주(劉永珠·가족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중년에 접어든 많은 며느리들이 ‘이 고생은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한다”며 “‘낀 세대’인 이들은 시부모에게서 받은 ‘시집살이의 노고’를 자기 며느리에게는 그대로 물리지 않아 고질적으로 이어온 고부갈등의 고리를 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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