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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9월 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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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짝짓기를 하기 전에 다른 동물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영역 표시를 해 놓는다. 조용한 곳에서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기업도 투자를 할 때 호랑이처럼 모든 정성을 다 쏟는다.”
호랑이 행태에 관한 A 씨의 주장이 미심쩍어 야생동물학자 B 씨에게 물어보았다. B 씨는 “호랑이가 영역 표시를 한 뒤 달빛 아래서 짝짓기를 하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호랑이의 예민한 성격으로 보아 조용한 곳을 선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변이 어수선하면 호랑이는 짝짓기를 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B 씨의 말을 전하자 A 씨는 투자 부진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놓았다.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을 짝짓기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덩치 큰 호랑이는 아예 짝짓기를 못하게 하는 규제가 있다. 게다가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으니 어떤 호랑이가 짝짓기를 하겠나. 요즘 한국 기업의 투자 현실이 이렇다.”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스도 ‘투자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에서 나온다’고 설파한 것을 보면 A 씨의 주장을 억지라고 무시하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기업인이 A 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투자 부진은 한국의 장래를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 올 상반기 설비투자 증가율은 3.0%에 그쳤다. 2001년 이후 연평균 0.3%라고 한다. 그나마 기존 설비의 개보수(改補修)가 대부분이고 미래를 위한 신규 투자는 미미한 실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산율마저 급락하고 있다. 세상이 어지러워 사람마저 짝짓기를 기피하나. 투자율 하락은 자본 부족을, 출산 기피는 노동력 부족을 가져온다. 성장의 양대 요소인 자본과 노동이 다 이러니 잠재성장률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투자 부진은 외환위기 이후 경영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에서 근인(根因)을 찾아야 한다. 위기 이전 대기업들은 은행 돈을 빌려 고위험 고수익 사업에 과감히 투자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위기 이후 위험을 떠안게 된 은행과 투자자들은 과거형 투자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결국 투자 거품이 꺼지고 비효율적 투자가 줄었지만, 기업가 정신이 위축되고 투자 여건도 나빠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언론사 논설 및 해설 책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대기업이 하자는 것은 거의 안 해 준 것이 없다”고 밝혔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기업가 정신의 부족을,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수익 모델 발굴의 실패를 투자 부진의 원인으로 꼽았다. 환경은 괜찮은데 호랑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와 기업이 이처럼 ‘네 탓’ 타령을 하며 평행선만 달린다면 투자 회복은 힘들어진다. 호랑이가 짝짓기를 안 해 멸종되면 그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온다. 정부는 채찍만 들려고 하지 말고 호랑이의 까다로운 특성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업도 정부와 환경 탓만 하고 있어서는 오래 번성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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