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별아]남편이 건넨 캔디의 기적

  • 입력 2005년 3월 13일 18시 11분


어떤 사람들이 유독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것에 집착하는 이유가 삶의 ‘스위트니스(sweetness)’ 부족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위트니스’는 우리말로 직역하면 ‘단맛’이지만 이외에도 아름다움, 신선함 혹은 유쾌, 친절, 사랑스러움의 뜻까지 가지고 있다.

무릇 중독이 결핍을 보상받기 위한 충동에서 빚어지는 과다 행동이라면 설탕 중독 역시 달콤함에 대한 은밀한 갈구에 다름 아니다. 아름답지 못한 현실, 유쾌하지 않은 관계,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고립된 감정이 초콜릿과 사탕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부드러운 손길이나 다정한 눈빛처럼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상점의 판매대 어디에서나 손쉽게 찾을 수 있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다행이다. 고맙다. 초콜릿과 사탕을 먹는 사람들 모두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단맛 중독은 사랑의 결핍?▼

밸런타인데이(2월 14일)와 화이트데이(3월 14일)에 연인들이 달콤한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본다. 국적 불명의 명절, 상업주의의 축제라고 비난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사랑의 이벤트를 벌이며 서로를 확인하고픈 열망까지 가로막을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젊은이들만의 특권인가.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돈과 명예와도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내밀한 가난을 앓는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쑥스럽고 낯간지러워진 중장년과 노년층에게도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삶의 에너지다. 이쯤에서 무슨 배부른 사랑타령이냐고 타박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보다 외로움과 고독에 지치고 사랑에 굶주려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언젠가 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부모가 자신들이 좋지 못한 부부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남 보기 그럴듯하게 살아온 노부부가 스스로 그토록 쓰라린 평가를 내리는 이유가 놀라웠다. 아버지가 딸의 성장에 지나친 애정을 쏟아 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소외되었음이 ‘나쁜 부부’의 증거라는 것이다. 부부 관계가 중심이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가 중심이 되어 온 우리의 가족문화에서 비추어볼 때 그것은 매우 낯설고도 신선했다.

결혼과 동시에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고 가정이라는 어항 속에 잡아 둔 고기가 굶는지 먹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밖으로만 떠도는 아버지. 남편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로부터의 격리감, 자기 인생의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방편으로 오로지 자식들에게 희생 헌신하는 어머니. 이런 부모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 부부의 사랑이란 다른 은하에서 생긴 별의 폭발이나 진배없다. 소수의 ‘닭살 커플’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요컨대 ‘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나쁜 부부’일 수밖에 없다.

▼아내를 여자로 만드는 날▼

TV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사랑의 결실이 결혼일 수는 없다. 결혼은 때로 사랑의 종말이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 위태로운 결혼은 반드시 달콤함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물론 달랑 사탕 몇 개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피나 보석도 아닌 꽃 한 송이, 사탕 한 봉지로 아내 속에 숨은 여자를 깨울 수 있다는 건 지극히 경제적이고도 신비로운 일이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남편이 무심코 건넨 하잘것없는 유행에 금세 달콤해지는 그 소박한 여자야말로 정녕 애틋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김별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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