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흥주]‘새로운 가족 만들기’ 공론화 해야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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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우면 가족이 등장한다. 1970년대 신보수주의 물결 속에 가족위기 논쟁이 치열했던 서구의 경험, 험난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 “가족만이 희망이다”라고 목소리 높이던 우리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2005년 새해 들어 가족이 다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TV 광고에서 가족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경제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증거일 게다. 정부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새로 ‘가족화합’ 대국민 홍보에 나서 친절하게도 화목한 ‘건강’ 가정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남녀차별을 제도화한 호주제가 헌법재판소에서 ‘뇌사 판정’을 받았다. 호주제를 통해 떠받들어지던 ‘그’ 가족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양성 평등과 개인 존엄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족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번 헌재의 판결은 적절하고 명쾌하다. 그 때문에 정부와 여당은 물론이고 보수를 자처하는 야당까지 환영일색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편하지가 않다.

▼호주제 폐지이후 가족관 변화▼

사실 올해 들어 정부와 언론이 만들고 있는 건강가족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엄마는 그 뒤에서 응원을 보내는 그런 가족이다. 겉으로는 평등하고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근대의 황금분할이라 자랑하는 성별 역할분업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호주제 폐지로 전통의 굴레는 벗게 됐지만 근대의 굴레는 여전하다. 이렇게 ‘일정한 형태’의 가정만이 건강하다는 주장은 새로운 ‘정상 가족’의 신화 만들기 같다.

더 큰 문제는 가족 부양 체제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효’의 강조를 통해 노인 부양의 가족 책임을 강조하는 것, 아동 양육의 여성 책임을 강조하는 것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목한 가족관계를 강조하는 가족도덕운동이 사회적인 안전망 확충에 힘써야 할 정부와 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가족은 광복과 전쟁 공간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복지를 떠맡아 왔다. 외환위기 때도 가족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족이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최근의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의 가족이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엔 역부족이다. 결혼율과 출산율은 1970년대 이후 최저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혼율은 급증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벌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계속해서 가족을 통한 복지만을 강조한다면 가족 해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형태상의 해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가족의 해체다.

우리 사회의 가족은 지금 엄청난 책임으로 과부하에 걸려 있다. 이젠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 도덕운동이 아니라 가족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회정책으로 과부하를 풀어야 한다. 호주제 폐지는 다양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새로운 가족 만들기가 시작돼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족정치가 가족이 종교처럼 작동하는 현실 때문에 ‘새로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호주제 폐지에 대한 헌재의 판결 이후에도 한동안 혼란과 갈등은 지속될 것이며, 정책방향에 대한 혼선도 여전할 것이다.

▼‘복지’ 떠안아 가족 해체 가속화▼

그러나 가족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만들어 가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새로운 가족 만들기의 물결은 도도히 흐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호주제 폐지 논란에서 보아왔듯 갈등 상황에서 소요될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관련 시민운동이 활성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사회집단과 개별 성원의 주장이 교차하는 열려진 공간으로서 공론의 장을 만들고, 여기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새로운 가족 ‘만들기’는 신화가 아닌 현실로 빠르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김흥주 재단법인 한국청년정책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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