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무례(無禮)’의 시대

  • 입력 2004년 12월 29일 17시 51분


올해 미국사회를 잘 보여주는 단어로 ‘무례(incivility)’와 ‘레드 스테이츠(red states)’ ‘블루 스테이츠(blue states)’가 선정됐다.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미국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레드 스테이츠는 공화당, 블루 스테이츠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주를 말하니까 결국 ‘분열’을 뜻한다. 오죽하면 USA를 풍자한 DSA(Divided States of America)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한국에서는 일간지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는 교수 162명이 올해 한국사회를 가장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를 꼽았다. 중국 한나라 말기 ‘뜻이 같은 사람끼리 붕당을 만들어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더니’ 결국 망국으로 치달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구 반대편의 두 나라가 한 해를 결산하며 선정한 단어가 놀랍도록 일치하는 게 경이롭다. 무엇이 두 나라에서 똑같은 현상을 나타나게 한 것일까.

사실 미 대선이 끝난 뒤 존 케리 후보는 깨끗이 승복했다. 그러나 ‘올해의 단어’가 보여주듯 앙금은 남아 있다.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사회 분열이 깊어지면 진정한 승복은 어려운 것일까. 과정이 타락하면 패자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제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테러리즘과 테러와의 전쟁도 ‘무례’와 ‘분열’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국가 간, 민족 간의 테러리즘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할 다른 수단이 없을 때 나타난다. 좌절과 증오가 쌓이다 보면 급기야 최소한의 ‘인간의 도’마저 저버리는 테러로 대항하게 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테러와의 전쟁은 증오를 확대 재생산해 테러를 더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때로 ‘국가테러’를 저지른다는 비난을 받는 강자가 테러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 일일까.

노사관계는 어떤가. 노사가 서로를 함께 가야 할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분열),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무례)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닐까. 한 해를 보내면서 노와 사는 생각해볼 일이다. 서로가 타협보다는 싸워 완전히 굴복시키려 들지 않았는지….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이 된 것은 아닌지….

미국과 한국에서, 그리고 국제정치에서조차 ‘무례’와 ‘분열’이 횡행하는 것은 좀 더 깊은 뿌리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과지상주의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이를 위해 경쟁과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회 시스템이 두 나라에서 동시에 비슷한 현상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은 또 꼬리를 잇는다. 그렇다면 경쟁 원리와 효율 추구로 세상에 번영을 가져온 자본주의의 미래는 기껏 상대에 대한 ‘무례’와 사회적 ‘분열’이란 말일까. 각 이해집단의 이기주의적 요구는 공동체 안에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1인 1표’를 표방하는 민주주의와 ‘1주 1표’를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계속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결국 국가의 기능은 제한되고 초국적 기업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미래학자들의 전망은 맞아들어 가는 것일까. 변하는 것에 적응하는 것만이 경쟁력일까. 변화를 변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인간의 미래는 암울한 것일까.

한 해를 마감하면서 상념에 잠겨본다.

김상영 국제부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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