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 비상구가 없다]<1>무더기 창업의 그늘

  • 입력 2004년 11월 28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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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10시.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먹자골목인 ‘삼양극장길’. 지하철 4호선 미아역부터 삼양시장까지 700여m에 걸쳐 갈비집 삼겹살집 분식집 호프집 치킨집 등 100여개의 음식점이 빽빽하다. 노래방 소주방 등까지 합친 전체 가게 수는 무려 400여개. 2년 전만 하더라도 평소 이 시간이면 직장인들로 활기가 넘쳐나던 곳이지만 요즘은 한산하기만 하다. 15년째 이곳에서 ‘전국부동산’을 운영해온 박문수씨(47)는 “매물로 나온 음식점만 70%나 된다”며 “권리금을 안 받아도 좋으니 팔아만 달라는 가게도 많다”고 말했다.》

장사가 안 되는 직접적 원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내수 불황이다. 하지만 ‘자영업 대란(大亂)’의 원인을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퇴출만 있고 재진입은 어려운 정규직 노동시장,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 자영업 문화의 부재,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자영업 인프라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노동시장의 왜곡이 불러온 자영업 창업 붐=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비중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을수록 낮아진다. 한국도 1990년대 들어 자영업자 비중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잃은 40대들이 앞다퉈 도소매·음식숙박업 등 서비스업 창업에 뛰어들면서 다시 자영업 비중이 높아졌다.

은행에서 1998년 명예퇴직한 김모씨(41)는 다른 정규직 직장을 알아봤으나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중소기업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2000년까지 여러 금융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했으나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해 그만두고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아동복 매장, 편의점 등을 운영하다 명예퇴직금 2억원을 모두 날리고 현재 실업 상태다.

서비스업 자영업자 수는 1994년 434만3000명에서 2003년에는 529만2000명으로 급증했다. 10년 만에 94만여명(21.9%)이 늘어난 것. 전체 자영업에서 서비스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1994년 58.9%에서 지난해 68.4%로 크게 늘었다.

자영업 창업이 폭발한 것은 강성노조를 갖고 있는 대기업의 정규직 과보호와 산업구조 고도화의 실패로 신규 일자리 창출은 부족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직장에서 밀려난 가장들이 갈 곳은 비정규직이나 자영업 창업밖에 없었다. 요즘에는 취업난으로 젊은이들마저 자영업 창업에 나서고 있다.

▽정부의 근시안적 정책=정부는 외환위기 후 통계상의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생계형 창업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2%대에 머물던 실업률이 외환위기 후 7%까지 치솟자 정부는 실업자 구제를 위해 자영업을 활성화한다며 창업자금을 지원했다.

정부는 1999년부터 중소기업청과 중앙소상공인지원센터 등을 통해 5인 미만의 서비스업, 10인 미만의 제조 및 광업 등을 창업하려는 사람에게 5000만원 이하의 창업자금을 저리(低利)로 빌려줬다. 지금까지 이런 지원으로 문을 연 점포는 8만여 곳에 이르고 지원금액은 1조8980억원이다.

정부도 뒤늦게 자영업 창업 촉진책이 적잖은 부작용을 가져왔음을 인식하고 있다. 저부가가치의 생계형 창업이 경기 진폭을 더욱 확대하고 심각한 불경기가 겹치면서 신용불량자와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등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문제화하고 있기 때문. 최근 전체 신용불량자 수는 줄어들지만 유독 40대 이상에서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는 것도 창업자금으로 빌린 돈의 이자도 갚지 못하는 자영업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흐름에 역행한 한국의 자영업=선진국의 영세한 구멍가게나 슈퍼마켓, 동네 문방구도 ‘서비스업의 산업화’ 추세로 할인점이나 프랜차이즈형 대기업에 의해 도태됐다. 또 인터넷의 확산과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고객들은 시설이 좋고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음식점에 몰리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다.

나정기(羅政基) 경기대 호텔관광학과 교수는 “맛이 있다고 소문난 집에는 멀리 있어도 자동차를 타고 찾아가는 것이 주5일 근무제 시대의 풍경”이라며 “가깝다고 허름하고 서비스가 나쁜 동네 음식점을 찾는 시절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예비 창업자, 창업컨설턴트 모두들 이런 흐름을 읽지 못하면서 자영업은 불경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국 서비스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 생산성의 63.0%에 불과하다. 반면 일본은 96.0%로 제조업과 비슷하며 독일과 대만은 각각 102.0%, 117.2%로 더 높기조차 하다.

한국처럼 ‘떠밀려서 하는’ 창업을 선진국에서는 찾기 어렵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뒷골목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코셰 디디에(46)는 24년간 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다 작년에 카페를 냈다. 그는 단골손님 수백명의 기호를 꿰고 있다. 최근 뉴욕 브루클린에서 옷가게를 연 재미교포 김모씨(36)는 현지에서 디자이너로 10년 가까이 일했다. 일본의 음식점이나 여관 등은 수백년간 대물림해서 내려온다.

미국 뉴욕과 뉴저지에서 한식당과 중식당 등 3개의 식당을 운영하는 교포 박득수씨는 “대기업에서 사무직 근로자로 20년간 일하다 갑자기 갈비집이나 여관을 하고 전직 은행원이 노래방이나 옷가게를 창업하는 모습을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파리=금동근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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