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최순덕 성령충만기’…내몰린 사람들의 ‘슬픔’

  • 입력 2004년 10월 29일 16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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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이후 5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낸 이기호씨는 요즘 젊은 세대 작가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튼실한 서사성을 갖추면서도 다양한 문체 실험을 선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등단 이후 5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낸 이기호씨는 요즘 젊은 세대 작가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튼실한 서사성을 갖추면서도 다양한 문체 실험을 선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최순덕 성령충만기/이기호 지음/336쪽 1만원 문학과지성사

1999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젊은 작가 이기호씨(32)가 5년 만에 낸 첫 소설집이다. 작가는 요즘 젊은 세대 작가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튼실한 서사성을 갖추면서도 다양한 문체 실험을 선보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근대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애정과 눈길을 보내는 글을 쓰겠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춘녀, 고아 소녀, 지하철 앵벌이, 문맹 청년 등 사회의 중심부에서 내몰린 주변부 사람들이다.

이기호 소설에서 우선 보이는 특징은 실험적 작법이다. 고교를 겨우 졸업한 여주인공이 골목에서 알몸을 내보이는 변태 남자를 기독교도로 만든 과정을 그린 표제작 ‘최순덕…’에 나오는 성경 문체나 매춘녀 순희가 인기가수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린 등단작 ‘버니’에 나오는 랩 문체에서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신인 특유의 열정과 야심이 엿보인다.

‘순덕이 뛰어가면서 생각하기를 오늘은 이쯤하면 되었도다 이는 기나긴 전도 고행의 첫 시작이니 서두르지 않으리다 대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데도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늘 하물며 악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증을 바로잡기란 백배 천배 더 어려운 법이니 그렇기에 하나님이 저를 택하셨도다 그것이 하나님이 저를 세상에 내보낸 의미도다 하더라’(‘최순덕…’ 중)

‘내 나이 열아홉, 세상이 좆같다는 걸 충분히 알 나이,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잘난 놈은 어떻게 사는지, 못난 놈은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알 나이, 돈이 왜 좋은지, 사람은 왜 때리는 걸 좋아하는지, 몰려다니는 게 좋다는 걸, 혼자 남으면 무섭다는 걸, 모두 다 아는 나이’(‘버니’ 중)

문학평론가 백지연씨는 “재치 있는 글쓰기 방식과 도덕적 삶의 정형에서 벗어나 있는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점은 작가라는 무거운 자의식을 떨치려는 경쾌한 유희의식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이기호 소설의 진짜 매력은 이런 발랄한 화법 뒤에 숨어 있는 슬픔과 환멸”이라고 말한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파 그럴듯한 환상들을 품고 있지만, 현실은 여지없이 그 꿈을 배반한다.

학창시절, 본드 흡입으로 교도소를 드나들다 우연한 기회에 극단의 음향기사 보조로 일하게 되는 남자가 극단 연출자의 나태와 무능을 꼬집으면서 갈등을 빚다 연출자를 본드 흡입으로 기절시키는 ‘햄릿 포에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모든 것이 다 꿈이거니, 다 환각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때론 현실보다 더 생생한 환각도 있으니까요…. 한편으론 다행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 주위의 모든 것이, 심지어 제 자신조차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아무 변화가 없는데 나만 혼자 미쳐 날뛰고 있는 듯한 두려움, 혹은 외로움 같은 거 말입니다.’

‘작가’입네 폼 잡지 않으면서 소설가의 본질인 진정한 이야기꾼이기를 소망하면서 삶의 비루함과 환멸을 경쾌하게 담아내려는 이 작가의 다음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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