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마오쩌둥 부인 장칭 체포

  • 입력 2004년 10월 5일 18시 38분


코멘트
중국 현대 정치사의 최고 여걸 장칭(江靑). 1976년 10월 6일 그는 자택에서 비단 잠옷을 입고 외국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들이닥친 중앙경호대 요원들.

“당중앙은 당신을 격리심사하기로 했다. 별도의 장소로 즉각 연행한다.”

그는 노기 띤 얼굴로 요원들을 한참 노려보다가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이미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떠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핵심권력 ‘4인방’을 구축했던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도 모두 같은 날 체포됐다. 이로써 10년 동안 중국대륙을 극좌주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년)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문화혁명 기간 중 장은 건강이 악화된 남편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대신해 군과 홍위병을 호령한 실권자였다. 그가 누린 권력의 사치는 갖가지 기행(奇行)으로 나타났다.

젊은 남자의 피가 혈색을 좋게 해 준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젊은 병사 100여명의 피를 수혈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면서 기뻐했다. 그는 또 “부하들의 머리가 나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면서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부하들이 바닥에 쭈그려 앉도록 명령했다.

1976년 3월 한 인민집회장. 장의 정치적 야망은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에 비교합니다. 영광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를 지켜본 마오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장보다 당내 서열이 낮은 화궈펑(華國鋒)을 후계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잡은 화는 마오가 사망한 지 28일 만에 장을 ‘반혁명분자’로 체포했다.

1981년 ‘4인방’의 인민재판장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사형 판결이 떨어지자 장은 “나는 아직 마오 주석의 후계자다”라며 재판장에 누워 발악했다. 감옥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앗아가 버린 자들에 대해 저주로 일관했던 그는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1년 77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야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게임의 법칙’인 나라에서 권력욕을 너무 훤히 드러낸 장칭. 그 결과는 비참한 말로였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