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후손 욕보이기’인가

  • 입력 2004년 8월 23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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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일제(日帝) 말기 함경남도 원산의 세관에서 일했다고 하고, 경성사범 나온 걸 자랑하던 어머니는 일본말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이었다고 한다. 1949년생인 나로서는 그 시절 부모의 이력을 그 정도로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일제 때 관리와 선생을 했다면 그 자체로 친일(親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친일파의 자식인가?

그러나 광복 후 월남했던 나의 부모는 3대가 떵떵거리기는커녕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당신들 대조차 힘겨웠던 필부필부(匹夫匹婦)였다. 그리고 망향(望鄕)의 한(恨)을 이고 남녘땅에 묻혔다. 과연 나의 부모는 친일파인가?

▼‘친일파 자식’ ‘빨갱이 자식’▼

역사의 정리를 원한다면 36년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숱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의 조건부터 헤아려야 한다. 그 시대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일정한 친일의 굴레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36년은 누구나 항일(抗日)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1945년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관심사는 안정적 남한 통치였다. 그들에게 조선의 민족정기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 미군정으로선 일제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친일파’는 유용한 자원이었다. 이런 흐름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로 이어졌다. 국내 권력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끌어안았다. 이승만으로서는 지지 세력을 확충하는 한편 남한 내 좌익세력에 맞서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1948년 9월 출범했던 ‘반민족행위 특별위원회’가 1년도 못 돼 사실상 해체된 것은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친일파를 철저하게 숙청했다. 명분이야 민족의 정통성 확립이었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란 점에서는 이승만과 다를 게 없다. 따라서 남한에서 ‘악질 친일파가 반공(反共)으로 탈바꿈해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시대적 조건의 산물이란 측면이 있다.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은 이승만이 해체했던 반민특위를 55년 만에 부활시키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민특위 해체가 잘못된 역사인 것이 분명한 만큼 늦게라도 친일 진상을 규명해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 정리가 아닌 권력 게임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딸’인 야당 대표에게 미리 족쇄를 채우는 한편 기득권 주류세력에 타격을 입히는 이중효과를 보자는 정치적 의도가 그것이다.

사태는 갈수록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다. 부친이 일제의 ‘겐페이 고초(헌병 오장)’였던 집권당 전 의장은 자신의 거짓말보다는 아버지의 친일 부역 탓에 물러나는 것인 양 “나를 밟고 가라”고 했다. 야당 대표는 “친북 용공 부역도 조사하자”고 나섰다. 이렇게 가다가는 역사 정리가 아니라 ‘후손 욕보이기’가 되기 십상이다. 너는 ‘친일파 자식’이고, 그러는 너는 ‘빨갱이 자식’ 아니냐는 삿대질이 온 세상에 난무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정말 나라를 결딴낼 텐가▼

이래서는 나라가 결딴난다. 그럴 개연성과 위험성이 너무 커 정치권은 과거사 문제에 나서지 말라는 것인데 돌아오는 답은 ‘반대하는 자는 뒤가 켕기기 때문’이라는 식의 냉소(冷笑)와 적의(敵意)뿐이니 큰일이다. 이쯤에서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진정한 역사 청산은 그를 통해 미래의 교훈을 얻는 것이지 가해와 피해의 편을 가르고 가해측을 공격해 피를 보자는 게 아니잖은가.

국회에 계류 중인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은 되도록 좁히고 구체화해야 한다. ‘인민재판식’ 여론재판의 우려가 큰 사료편찬 전 보도 허용은 금해야 한다. 전제돼야 할 것은 누가 봐도 편향되지 않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역사를 볼 수 있으리란 신뢰를 주는 인사들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정치권은 일체 손을 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나라가 결딴난다.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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