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5년 인류 최초로 독가스 살포

  • 입력 2004년 4월 21일 18시 37분


‘공기에서 빵을 만들고, 소금에서 독가스를 만들다.’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생화학무기를 처음 개발했다. 카이저빌헬름연구소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인체에 치명적인 염소 가스를 제조했고,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실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애국심은 단지 ‘실험실의 과학자’로 만족할 수 없었던 거다.

1915년 4월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 독일군이 바람에 날려보낸 ‘하버의 독가스’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참호에 숨어 있던 프랑스-캐나다 연합군 1만5000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5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이 실신상태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는 “독가스도 폭탄과 다를 바 없다”고 일축했다. ‘평화시에는 인류에게, 전시(戰時)엔 조국에 봉사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대량살상무기를 만든 하버였지만 ‘본의 아니게’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한 것도 그였다. 그는 현대 인류의 가장 위대한 화학적 업적으로 꼽히는 암모니아합성법을 개발했다.

화학비료의 원조 격인 암모니아합성은 유럽을 기근(饑饉)에서 건졌다. 식량생산량이 무려 6배나 늘어났으니 그것은 가히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농업혁명이었다. 1918년 그는 이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역시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다. 당초 연구목적은 독일이 전쟁에서 사용할 폭약의 원료(질산)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하버는 유대인 태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기보다는 독일인이기를 원했다. 자신의 ‘조국’을 위해 기꺼이 ‘민족’을 버리고자 했다. 그는 일찌감치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1933년 반(反)유대인 정책을 내세운 히틀러 정권이 부상하면서 이 위대한 독일의 화학자는 ‘유대인 하버’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해 어쩔 수 없이 실험실을 떠나야 했던 하버. 그는 같은 유대인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 생애에 지금처럼 절절히 유대인인 적은 없었네….”

그러나 히틀러는 그가 만든 독가스로 그의 동족(同族) 수백만명을 학살하고 말았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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