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나성엽/적십자사의 ‘혈액 정보’ 독점

  • 입력 2004년 2월 27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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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가 공급한 혈액으로 수혈을 받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2000년 4월 1일 이후 수혈을 받은 사람 가운데 4명이 B형 간염에, 5명이 C형 간염에 감염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왕절개 수술을 받으면서 수혈을 받은 뒤 간염에 이어 간경화가 생겼다.” “백혈병 치료를 받으며 수혈을 했는데 C형 간염이란 통보를 받고 절망했다.”

매일 이런 e메일이 기자에게 날아오고 있다.

적십자사가 2000년 4월 1일 이전에 공급한 혈액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어 이 시기에 수혈 받은 사람들의 불안감은 더욱 심하다. 설혹 감염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수혈로 감염됐는지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이번에 수혈 감염이 확인된 간염환자 9명도 적십자사가 혈액 정보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본인들은 감염 원인을 모른 채 병마에 시달렸던 것이다.

더구나 혈액 정보를 독점한 적십자사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알린 것도 아니다. 시사주간지 주간동아가 보도해 이 사실이 불거지자 적십자사는 마지못해 이를 인정했을 뿐이다. 적십자사측은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발표하겠다”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적십자사의 이런 행태 때문에 혹시 다른 수혈 감염 질환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 사례만도 13건에 이른다. 기자들이 수혈 감염 경위 등을 취재하기 위해 환자의 신상 정보를 요구하자 적십자사는 “절차를 밟아 본인들에게 개별 통보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한 제약업체 임원은 27일 “만일 사(私)기업이 만든 약품 때문에 간염환자가 단 한 명이라도 발생했다면 그 회사는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이 낸 적십자 회비로 운영되기 때문에 시장을 잃을 우려가 없는 적십자사가 무사안일에 빠져 발생한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번 일로 적십자사는 국민에게 헌혈을 호소할 명분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다. 국민이 믿고 ‘사랑의 헌혈’을 하고 수혈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한적십자사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나성엽 사회1부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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