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총선 길 잘못 들어섰다

  • 입력 2003년 12월 17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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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신임’을 묻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엔 ‘하야’를 스스로 거론하고 말았으니 아무리 보아도 이건 정상적인 정치 상황이 아니다. 대통령은 현 상황을 자신에 대한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비상 인식에는 조여 오는 불법 대선자금의 압박감이 한몫한 것이 분명하다. 드러난 500억원대의 불법 대선자금 때문에 한나라당이 쑥밭된 것 못지않게 노 후보 캠프도 궁지에 몰리긴 마찬가지다. ‘좌 희정, 우 광재’라는 좌우 최측근이 모두 흔들리는 상황이 됐으니 대통령도 시쳇말로 죽을 맛이고 그래서 어떡해서든 뚫어보려고 ‘하야’ 이야기도 나왔을 법하다. 여기에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씨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겠다’는 검찰 출석도 대통령에겐 압박이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

정상 상황이 아니어서 그런지 지금 정치판의 핏발 선 싸움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한쪽에선 ‘한나라당 해체’를, 또 한쪽에선 ‘노 대통령 당선 무효’까지 주장하는 험악한 지경이 됐으니 이런 사생결단식 싸움은 일찍이 없었다. 왜 이런가. 가장 큰 이유는 내년 총선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그러자니 미리 상대방을 묵사발을 만들어 무장해제하겠다고 작심한 것 아닌가. 그런데 총선에 이기겠다고 판을 이렇게 어지럽게 벌여도 된단 말인가. 벌써부터 총선 후 몰려들 사회적 갈등이 걱정이다. 악취 풀풀 나는 대선자금은 엄정한 법의 심판에 맡겨라.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탓하는, 아전인수식 싸움을 벌일 일이 아니다.

격앙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냉정하게 선을 긋고 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대선자금 공방이 총선전략으로서는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무장해제란 애당초 실현성이 없는 것인 데다 방법도 잘못 택했다. 우선 유권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1000억원을 받으면 더 나쁘고, 100억원은 덜 나쁘다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거북한 표현이지만, 정치판은 모두 도둑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현실적이다. 이런 판국에 서로의 치부를 물고 물리는 싸움으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정파의 눈엔 지금 백성은 없고, 오로지 무찔러야 할 정적만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하야’ 발언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10분의 1’ 셈법을 따져보면 한나라당을 제압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또 대선 때 나타났던 대통령 지지세력에 대한 총동원령인 셈이다. 한마디로 총선용 전략이란 냄새가 물씬하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입당시기도 당겨질 것 같지 않은가.

▼백성들 관심 뭐겠는가 ▼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국회의원을 왜 뽑는가. 총선이 상대방 죽이기 싸움인가, 어려운 나라살림 살리기 경쟁인가. 힘든 살림을 어떡하면 벗어날 수 있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으려는 것이 투표장으로 가는 유권자들의 마음이다. 먹고살기에 하루하루가 바쁜 유권자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라. 그들의 절실한 관심사가 아들딸의 취직이겠는가, 정치판 싸움이겠는가. 돈 싸움을 벌일수록 그들은 밥맛을 잃고 멀어져 간다. 아예 투표장에 갈 생각을 접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밖으로 내몰 셈인가.

대선자금 혼란 속에 슬그머니 묻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당선 전 거래나, 당선 후 잘 봐달라는 것이나 뭐가 다를 것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당선 후는 이야기가 다르다. 뇌물의 성격이 더욱 강하고, 권력형 비리와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호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당선 축하금이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통령의 ‘눈앞이 캄캄했다’는 토로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노 후보 공보특보였던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의 ‘세 번의 봄날 돈벼락론’은 의미심장하다. 로또복권 당첨처럼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돈벼락을 맞은 세 번째 봄날로 그는 당선 이후를 적시했다. 지금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정치판 형세를 보면, 대선자금 공방을 총선 코앞에까지 끌고 가겠다는 심사가 분명하다. 유권자도 그 싸움에 끌고 들어가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유권자는 이미 너무 피곤하다. 지친 유권자를 몰아붙이기만 하는 졸수(拙手)로는 선거에서 이기는 정당을 보지 못했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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