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안정옥, '여우 같다'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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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옷 중에서 내가 즐겨 입는 옷은 두어 벌

두어 벌을 위해 옷들이 장롱 속에 걸려 있다

식탁에 차려지는 그릇은 몇 개, 그 몇 개를

위해 한쪽에 쓰지 않는 그릇들이 포개져 있다

자주 꺼내 보는 책 몇 권, 그 몇 권을 위해

수백 권의 책이 너무 오래 먼지를 뒤집어썼다

몇 사람과 만날 뿐, 그 몇 사람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벌 떼처럼 윙윙거려야 했다

두어 벌 옷 때문에 세상의 장롱 속이 꽉 찼다

몇 개의 그릇, 몇 사람 때문에 세상은 포화다

눈물겨운 욕망들, 끝없는 집착, 더, 더,

보다 더 나은, 이 혼자 나이를 먹어 늙어터졌다

-시집 '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세계사)중에서

‘별 하나 빛나기 위해 창공이 다 필요하다. 제비꽃 하나 피기 위해 우주가 다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깃장일까?

별 하나와 제비꽃 하나의 사치는 너무나 거대해서 소박하지만 유독 인간의 사치와 욕심에 구린내 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 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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