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작은 강철여인

  • 입력 2003년 10월 13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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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됐다는데 이라크 여성들은 마음 놓고 문밖출입을 못한다. 폭력 범죄 약탈의 무정부 상태에서 가장 다치기 쉬운 존재가 여성인 까닭이다. 여학생들은 납치 강간 당할까봐 학교에 못 간다. 병원 오가는 길이 무서워 운전사를 고용해서는 제 월급을 고스란히 바친다는 여성 치과의사도 있다. 성폭행 뒤 목숨을 부지해도 다행이라 하기 어렵다. 결국은 가족에게 ‘명예살해’ 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탈레반 정권에서 해방된 지 2년이 된 아프가니스탄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최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전했다. 미국이 탈레반을 내쫓고 난 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부인 로라 여사가 “여성인권 없이 아프간 발전도 없다”고 한 말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 셈이다. 여성인권이 없는 아프간도, 이라크도 혼돈 속을 헤매고 있으니.

▷첫 이슬람권 여성이자 이란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시린 에바디는 ‘악의 축’으로 지목됐던 이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나라에선 대학생의 63%가 여학생이다. 노동인력의 30%를 여성이 담당하고 국회의원 270명 중 14명이 여성이다. 물론 아직도 여성이 일하거나 해외여행을 하려면 남편이나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이혼을 하려 해도 여성에겐 훨씬 장애물이 많다. 그래도 이만한 지위를 확보하기까지는 변호사로, 인권운동가로 투쟁해 온 에바디씨 같은 여성들의 활약이 있었다.

▷테헤란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4년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가 됐지만 5년 뒤 이란혁명이 나자 판사직에서 쫓겨났던 그였다. 여성은 너무 감정적이어서 이슬람법상 법관을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에바디씨는 저항과 폭력 대신 오히려 그 이슬람법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했다. 이슬람법에 여성이 열등하다는 근거가 없음을 밝혔고, 코란도 환경변화에 맞춰 재해석해 인권 및 민주주의와 나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도 인간이어서 두렵지만 이를 극복하는 걸 배웠다”고 했다. 몸집도 작고 목소리도 부드러운 그의 겁 없는 투쟁을 보고 이란 사람들은 ‘작은 강철여인’이라 불렀다.

▷에바디씨의 노벨상 수상은 그러나 로마에서부터 그의 조국 이란에 이르기까지 편치 않은 여운을 남긴 듯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상을 잔뜩 기대하던 교황청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이란 보수강경파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북돋우려는 유럽의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며 전전긍긍하는 눈치다. 폭력의 시대를 법을 통해 비폭력으로 맞선 작은 강철여인이 중동을 바꿔놓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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