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294…손기정 만세! 조선 만세!(22)

  • 입력 2003년 4월 16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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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점 주인은 주머니에서 담배 깡통을 꺼내 종이에 말아 입에 물었지만, 저고리 소매에는 성냥이 들어 있지 않았다. 우철이 성냥을 그어 불을 내밀자, 박씨는 게걸스럽게 담배를 빨아들이고는 연기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골라인의 테이프를 끊는 순간, 손기정은 2천3백만 동포의 마음을 해방시킨 기라. 이번 사건으로 신문은 망했다. 손기정도 더 이상은 달릴 수 없을지도 모르재” 하고는 담배를 땅에 버리고 발로 짓뭉갠 후, 그 발에 힘을 준 채 말했다.

“하지만도, 아무리 힘 있고 강한 적이라도, 마음만은 묶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라. 우리는 일어날 기다. 아무리 짓밟아도, 일어날 기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까네”

박씨는 말을 끝내자, 우근은 한참 맞붙어 싸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억지로 떼어놓은 사람처럼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쉬고는 훌쩍거렸다.

“자, 된장국 다시 데워 왔다. 식기 전에 먹어라” 희향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어린애 같았다.

우근은 입술을 앙다물고 심호흡을 하고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운동화 끈을 풀었다. 눈물이 한 방울씩 콧등을 타고 떨어져 손등과 새 운동화를 적셨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기쁨에 빛나던 우근의 눈이 지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다.

식사를 끝낸 우철은 마당으로 내려갔다. 비누를 물에 적셔 두 볼과 목에 비벼대고, 아버지의 유품인 장도칼을 손에 꽉 쥐었다. 매앰 매앰 매앰 찌르르르 찌르르르 지-지-지-, 구름이 우철이 서 있는 곳에 그늘을 드리웠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갑갑해졌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햇볕이 비치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여동생이 심은 도라지 옆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충격에 떠는 듯한, 경멸하는 듯한, 애통해 하는 듯한, 감정이란 모든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 우철의 눈과 남자의 눈이 한 치 어긋남 없이 겹쳐지는 순간, 태양을 직시한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매앰 매앰 매앰, 지-지-지-, 눈을 뜨자 땀과 피가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 떨어졌다. 혹독한 더위에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철은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외침을 발했다.

손기정 만세!

조선 만세!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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