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조영남/너무 멋졌던 장영주의 ‘말’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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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나처럼 질문을 많이 하고 반대로 답변도 많이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나는 직업상 이른바 유명연예인이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각종 신문 방송 등으로부터 무수한 질문을 받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TV에서 ‘체험 삶의 현장’이나 ‘조영남이 만난 사람’ 같은 고정프로를 진행하는 사회자이기 때문에 이번엔 내 쪽에서 출연자들을 향해 무수한 질문을 퍼붓게 된다는 얘기다.

▼“성공은?” 우문에 “즐거움” 현답▼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질문을 하거나 받거나 둘 중 한쪽으로 기울어지는데 나는 골고루 균형을 잘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행운아다. 그럼 뭐가 그리도 행운이냐. 질문할 때는 타인의 삶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고, 반대로 답변할 때는 내 삶을 총괄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타인과의 질문과 답변 속에서 재구성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많은 질문과 답변들 속에서 때때로 짜릿한 즐거움까지 얻게 되니 어찌 으쓱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가지 경우만 예로 들겠다.

지난주 나는 TV 제작팀과 함께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로 세계가 찬탄을 아끼지 않는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영어이름은 사라 장)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개인 인터뷰 프로그램을 통해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수없이 만나왔지만 역시 장영주는 달랐다. 한마디로 너무나 멋졌다. 달리 표현해 낼 길이 없다. 그녀는 시종 평이함 그 자체에서 벗어나질 않았지만 나는 그 평이함이야말로 최고수의 멋이라는 걸 감전(感電)된 듯 실감하게 된 것이다.

우리 대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엔딩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정녕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져서 그랬을까. 내가 억지로 생각해 낸 마지막 질문은 어처구니없게도 “영주씨! 성공이 뭐죠?”였다. 세상에 이런 막연한 질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한 호흡도 쉬지 않고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한다.

“성공요? 그냥 즐겁고 편안하게 되는 거죠.”

나는 내친 김에 스물셋의 처녀에게 “사랑이 뭐죠?” 하고 묻지 못한 걸 지금 끔찍이 후회한다.

이번엔 내가 받은 질문에 관한 얘기 한 꼭지.

나는 며칠 전 ‘2003 통영국제음악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윤이상 교가 합창제’에서 음악감독을 무사히 수행한 것에 대한 생방송 TV 인터뷰를 위해 통영문화회관 언덕배기에 설치된 간이 특설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언덕 위에 있는 조각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세 살짜리 손자를 동반한 소박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우리는 한가롭게 인사도 나누고 얘기도 나눴다. 그때는 정오가 가까워질 때였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직장엘 나가기 때문에 매일 손자와 함께 조각공원에 오르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손자아이와 놀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내 옷깃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급기야 조용한 목소리로 “저…, 와이셔츠가 저고리 밖으로 나왔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그것도 멋이라고 와이셔츠를 허리띠 밖으로 일부러 내놓고 있었는데….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무안하지 않게 옷을 집어넣는 척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누구인지를 첫눈에 알아보시긴 했지만 왜 대낮에 혼자서 이런 데까지 와 서성대는지 못내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물론 할아버지가 잘 알아듣게 설명해 드렸다. 방송 시간이 다가오자 스태프 한 명이 나타나 생방송 현장으로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할아버지와 손자와 함께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때 할아버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묻고 답하다 보면 인생이 보여▼

“그런 거 하면 생활비는 좀 버우?” 내 생애에 가장 진땀나게 만든 질문 중의 하나였다.

내가 생각해 낸 대답은 겨우 이거였다.

“근근이 먹고 살아요, 할아버지.”

장영주는 최고의 답변자였다. 그러나 조영남은 최악의 답변자였다.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뭐가 되든 위장(僞裝)이 때로는 예의로 둔갑하는 삶의 속절없음을 명심하시라.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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