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 입력 2003년 1월 24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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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성석제 지음/231쪽 8800원 문학동네

바로 곁에도 자질구레한 일상이 넘쳐난다. 몇 번씩이고 흘낏 스쳐갔을 법한 비슷비슷한,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이 속에서 성석제(43)가 포착해내는 일상의 이면은 독특한 매력으로 빛을 발한다. 시침 뚝 뗀 의뭉스러움, 곧 ‘성석제식’으로 표현된 범속한 인간사에 끌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성석제의 글은 위험하다. 폭발물이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도 독자들은 그토록 부상-재채기처럼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 말이다-을 당하면서도 책을 덮지 않는다. 웃음 폭탄 세례를 받을 때마다 나와 너, 이웃과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콩트 식의 짧은 작품 22편을 한데 모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때론 만담(漫談)처럼, 카툰처럼 풍요로운 입담과 재치를 부리는 그의 솜씨는 모자람이 없다. 인용한 시인 이문재의 발문처럼, 책장을 넘기며 혼자 낄낄거리다 웃음을 그친 뒤에는 ‘인생이 뭔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의 답을 얻은 듯도 싶어지는 게 바로 성석제의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은 엄숙하지 않다. 오늘을 사는, 평범하고 속된 내 모습이자 이웃의 모습 그대로다.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운 작가의 시선을 통해 비치는 과거와 이어진 현재의 우리.

합법적인 사냥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불법 사냥꾼들(누가 염소의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 군대시절 취사반장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가로 얻어먹은 기념비적이고, 호소력 그 자체였던, 신병 ‘성말구’의 목을 메게 했던 한 그릇의 라면(군대라면)을 비롯해 대통령까지 지낸 어느 위인이 보여주는 번쩍, 하는 그 황홀한 순간(보이지 않는 손), 공항에서 만난 우아하고 세련된 신종 새치기 ‘샥족’(샥족 발견), 생활의 무게에 짓눌린 어머니의 쉼터(약방 할매) 등이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현된다.

“평범하게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지. 가장 쉽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지럽지 않지.”(길) “기계나 사람이나 돌다 멈추면 죽는 법이여. 계속 돌게 해야 해.”(경운기 주정차 금지 위반)

징검다리를 건너는 독자에게 내미는 작가의 깊고 따뜻한 손은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의 방식이 그저 해학과 풍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 인생은 순간(瞬間)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작가 후기)

‘새삼스럽게 소설은 직격(直擊)이 아니라 비유라는 생각을 했다’는 작가의 말이 이 소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듯도 싶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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