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I'm not an American

  • 입력 2003년 1월 14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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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들은 얘기다. 요즘 서울에 사는 서양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나 ‘안녕하세요’가 아니다. ‘I’M NOT AN AMERICAN’이다. 봉변을 당할라치면 ‘미국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모대학 캠퍼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외국인 유학생이 갑자기 ‘CANADA’라고 크게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강의실에 나타났다. 이상하게 여긴 교수가 물었더니 대답이 이랬다. “강남역 근처에 갔다가 미국인으로 오인한 사람들한테 혼이 나서 옷을 바꿔 입었다.” 아마도 그 학생은 ‘I’M NOT AN AMERICAN’이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극소수의 사례일 테지만 ‘지나친 과장’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반미시위’가 휩쓸고 간 후의 일들이다. 두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시위에 ‘살인미군’이라는 팻말이 오르내리고 미군에 대한 폭행사건이 불거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고 미군에 항의했을 뿐이었다는 해명이 버거울 정도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까지 나서서 “반미는 극히 적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했다니 바로 그 극소수가 항상 문제다.

처음 촛불시위 땐 우리도 미국에 ‘할말을 하는구나’하던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오면서 결과는 엉뚱한 곳으로 튀고 있다. 미국의 한국기업들은 서울의 ‘반미시위’ 탓에 전전긍긍하고 있고 신용평가회사들은 신용등급을 재평가하겠다고 한다. 미국이 외교사절을 보내야 옳을 터인데 우리측이 특사를 파견한다며 고개를 숙인다.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언젠가는 철수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이 시점에 주한 미군 철수론은 등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10년 전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필리핀의 경우가 타산지석이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주둔했던 미군은 필리핀 국민의 반대로 1992년 수비크만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미군이 떠난 뒤의 경제적 타격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촛불시위를 하더라도 외국인을 배격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아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경우가 좋은 교훈이다. 일부 지역에서 부유한 화교들을 상대로 약탈행위가 벌어지자 외국 자본들은 인도네시아를 떠났다. 이후 인도네시아 경제는 오랫동안 어려웠다.

우리가 외국인을 박대하면 그만큼 돌려 받게 마련이다. 동남아지역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뒤에서 우리말로 ‘여보세요’라고 불러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뒤돌아보았다가는 큰 봉변을 당한다는 경고다. 한국에 와서 근로자로 일하다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복수를 하는 것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느 나라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사람까지 미워하고 무시해선 안 된다. 죄 없는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거리를 활보할 수 없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먼 데서 찾아온 손님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를 만들겠다고 한들 누가 믿어주겠는가.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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