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물은 목마름쪽으로 흐른다' '길과 풍경과 시'

  • 입력 2002년 12월 6일 18시 05분


◇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시집)/허만하 지음/176쪽 7500원 솔

◇ 길과 풍경과 시(산문집)/허만하 지음/294쪽 1만원 솔

시인 허만하(70). 그가 등단 후 30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솔)는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다. 한 시인은 “느닷없이 나타난 그의 시가 참 좋았다. 시집 한 권으로 ‘허만하’라는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고 말했다.

3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산문집과 함께 펴낸 그에게 전화로 인터뷰를 청했다. 시인은 먼저 질문을 e메일로 알려달라고 했다. 즉답을 내놓기보다는 생각을 먼저 정리하고 싶다는 이유.

꼼꼼하고 세심한 성품이 전화선을 통해 전해졌다. 전직 의사인 그에게 자연스럽게 새겨졌을 ‘세밀한 관찰과 분석’. 이러한 바탕에 깔린 ‘처절한 리얼리즘’(시인 김종길)이 전작에서부터 흘러와 시집 한 권에 가득하다. 그는 “비극적인 이미지와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했다.

“파스칼은 인간 사유에서 섬세한 이미지를 찾아냈다. 그와 비슷하게 내 시에는 기하학적 구도와 배경이 깔려 있다. ‘만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두 개의 직선이 교차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곳에서 미(美)를 찾는다.”

‘어미의 적혈구가 물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 보이는 반투명 덩굴을 몸에 두르고 양수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놀리는 어린 목숨이 움켜잡을 주어는 어미와 다른 나다.’(체중계 위에 서는 여자)

그러나 그에게 의사로서의 경험과 시작(詩作)의 접점에 대해 묻자 그는 “직업이 무엇이든 생계의 방법에 따라 시인을 논하지 말라. 시 쓰는 사람으로만 다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자연과학에 대한 경외감, 하찮은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몸에 배어있으며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이런 부분을 시의 영역에서 받아들이려 한다”고 덧붙였다.

“예전에 ‘머리’로 시를 썼다면 이제는 ‘심장’으로 쓴다. 이성에 기대기보다는 심정적인 사유가 더 강해졌다. 지난 시집을 내고는 ‘짜내지 말고 서정을 담으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내 자신의 목소리, 심정적인 것을 우려냈다. 비판에 대한 반성이다. 변증법적으로 또 발전적으로 내 자신을 개혁해 간다.”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는 비굴이 아니다. 물은 언제나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이번 시집에는 이전과 사뭇 다르게 일종의 ‘애정’이 어린 듯한 따사로운 느낌, 따뜻한 감정과 의지가 배어 있다. 특히 가족에게.

이번엔 가족에게 주는 말로 헌사(獻辭)를 썼고 시 속에 아내의 모습도 등장한다. 산문집 말미에는 외국에서 공부 중인 두 딸에 대한 짙은 애정도 드러냈다.

“지금까지 가족은 배경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문득 생활 그대로를 보이는 것이 독자와의 가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 중에 가족들의 큰 격려를 받았고 보답하지 않고는 안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시에 자연스럽게 발현됐다. 이 나이쯤 되면 아내와 딸들 얘기를 해도 ‘팔푼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것 같다.”(웃음)

그의 많은 작품들이 ‘길 위에서’ 쓰였다. 그 역시 “시의 현장은 길이다”고도 얘기한다. 부항재 고갯마루와 월정사 금강교에서, 선운사 감나무 아래에서 그는 시를 쓴다.

“삶의 길이 곧 여행의 길이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 너무 좋다. 순간순간 스릴을 느끼려면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정체돼 있는 상태를 거부한다.”

그가 최근 전남 보성 근처의 대원사에서 본 선명한 주황색 감과 겨울 나목들은 이제 곧 시구절로, 또 시의 풍경으로 재현될 것이다. 그는 ‘교만함이 안주(安住)를 부르면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까 싶어’ 또 길을 나선다.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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