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현인택/韓-美-日 공조 다져야

  • 입력 2002년 9월 17일 18시 33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극적인 북한 방문으로 일본과 북한 사이의 국교 정상화를 향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문제에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두 정상은 10월 중 수교를 위한 회담 재개에 합의했다. 또한 내년 말까지로 되어 있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의 동결 시한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내용에도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번 회담을 통해 일본으로서는 그간 국교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사과를 북한으로부터 받아냄으로써 큰 성과를 얻어냈고, 앞으로 수교회담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 더 위축될 수도▼

그러나 동시에 이 중대한 진전이 북-일관계뿐 아니라 한반도 안정에 명백하고 확실하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사일 발사실험 동결을 언급했지만 기타 다른 안보문제에 대해서는 상호 의견교환의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고, 공은 다시 남북한과 북-미간의 대화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바로 이 시점에서 이런 형식과 준비로 평양을 방문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는가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보다는 북한이 북-일 정상회담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데에는 몇 가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당면한 식량난과 언필칭 경제개혁으로 웅변되는 경제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정권의 위기를 타개할 묘책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그런데 미국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석양에 서 있는 한국의 현 정부를 쳐다만 보기에는 다소 불안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을 보는 조지 W 부시 미 정부는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북한과의 모든 대화채널을 열어놓겠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인 북-미 대화를 추진하지는 않았다. 대신 북한이 핵과 미사일, 그리고 재래식 무기 문제에 전향적으로 나오도록 내면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번 정상회담은 지난 1년8개월여에 걸쳐 미국이 걸어놓은 빗장을 일본이 풀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간에 한미간에 생겼던 대북 정책 견해차가 이제 태평양을 건너 미일 사이에 어떻게 전개될지도 중요한 관심사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밝힌 것처럼 일본이 미국의 기본정책을 뒤집어 놓지는 않겠지만 일단 열린 판도라 상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미일간의 정책조정에는 많은 노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북-일 정상회담은 확실히 기회인 것만은 틀림없다. 진전없는 북-미 대화로 대안이 없게 된 상황은 북한으로서는 숨막히는 것으로 이제 하나의 돌파구가 마련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이번 회담의 의미가 북한이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피해 일본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마주 앉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또한 한국 대선 이후 기존 남북위주의 대화 축을 이동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앞으로 남북관계는 오히려 현재보다 더 위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이즈미 내각의 앞으로의 행보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당분간은 평양의 파격과 여느 정상회담과는 다른 회담에서 오는 충격, 흥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 냉정을 회복하고 ‘평양 도박’을 위해 던진 첫 번째 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되길▼

무엇보다도 북-일 정상회담에 이은 수교 교섭은 단순히 북-일간의 당면 현안만을 해결하기 위한 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삼 다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북-일간의 교섭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 및 미국과의 양자협의뿐 아니라 한미일 3자 공조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간 3국간에 쌓아온 협력의 규범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중요한 안보 레짐이다.

고이즈미 내각의 앞으로 발걸음은 이번에 평양으로 간 발걸음보다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수교협상의 큰 틀은 마련했지만 일본 국내 여론을 여하히 추스르면서 이를 마무리짓느냐 하는 게 숙제다. 더욱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연관해 미국 및 한국과 어느 선에서 컨센서스를 이뤄낼 것이냐도 그에 못지않은 난제가 될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독자외교’가 진정으로 시험받을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현인택 고려대 교수·국제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