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조선시대 유생상소와 공론정치’

  • 입력 2002년 8월 16일 18시 00분


◇조선시대 유생상소와 공론정치<설석규 지음·477쪽 2만원 도서출판 선인>

이 책은 조선후기 정치사를 연구하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중종 대로부터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유생들의 상소문 2200여 건을 시대와 내용별로 분류하고 그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유생들의 상소를 통해 형성되는 공론의 양상과 그 의미의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정치사를 구조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공론(公論)이란 ‘국가 공공의 의논’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언론 혹은 여론이라는 말과 가깝지만, 단지 다수의 견해라기보다, 국가의 흥망이나 유학의 성쇠와 같은 대의명분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어야 했다. 중종 때 일어난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사건은 이러한 공론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인 성종 때에 거행한 행사라는 이유로 불교식 제사인 기신재를 복구시켰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 지식인이 등장하여 영향력을 점차 넓혀나가는 상황이었고, 이들은 당연히 불교 행사인 기신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사림파 계열 대신들이 몇 년에 걸쳐 건의했음에도 국왕이 듣지 않자,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나섰다. 이에 대한 국왕의 반응은 차가웠다. 대신들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너희들의 말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답했던 것이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전하의 그 말씀으로 인해 행여 이 나라를 잃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공론이 있는 곳에는 초야의 천한 사람 말이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고, 공론이 없는 곳에서는 조정의 높은 대신 말이라도 무겁게 여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구제하는데 있을 따름입니다.”

사림파의 중앙 진출이 마무리된 후, 조선의 조정은 왕권과 신권, 언관권이 균형을 이루는 정치구조를 이루었다. 국왕이나 신하,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언론의 따가운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언론이 언관이라 불리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관리들만의 몫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비 관리 집단으로 전국 각지에 거주하던 유생들의 재야언론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언론은 상소를 통해 공론으로 표출되었다. 상소에는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이 올리는 관소와 지방 향교나 서원, 각 행정단위에 거주하는 유생들이 올리는 유소가 있었다. 이들은 때로 힘을 합하여 연합소를 올리기도 했다.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승정원을 거쳐 국왕에게 전달되었는데, 특히 성균관 유생이 올린 상소에는 국왕이 직접 답변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유생들은 비록 현직 관리는 아니었어도 공론을 형성하는 주체로 기능했고, 이로 인해 조선시대의 정치 참여층이 그만큼 확대되는 효과를 낳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성리학적 붕당론이 주장하는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중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붕당은 공론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며, 공론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는 정치집단이다. 따라서 붕당은 공론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며, 그런 가운데 상호 견제와 공존을 유지하고, 세도정치와 같은 특정집단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정치사는 공론정치가 대두하여 정점에 이르렀다가 파경에 이르는 굴곡을 보여준다. 또한 정조가 공론의 방향을 국왕의 의도하는 대로 집중시킨 것은 왕권을 강화시키는 성과가 있었지만, 유생들의 정치참여를 규제하여 결국은 공론정치의 쇠퇴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생의 상소가 표방하는 것은 공론이지만 중앙의 정치세력과 정치적 연대를 맺고 작성될 경우에는 사실상 당론과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중앙 세력과의 연대 여부에 따라 상소가 작성되는 시간과 절차가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으면 상소를 작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거나, 수적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연명을 하는 유생들의 숫자가 늘어났던 것이 그러한 예이다.

유생의 상소가 실제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국왕이 이를 채택해야만 했다. 유생들은 공론을 표방하면서 당대 정치의 잘잘못을 거론할 수는 있었지만, 정책을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은 국왕과 대신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론의 실천에 있어서는 특히 국왕의 최종 판단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유생들의 상소는 공론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하고, 정치참여층을 크게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들이 형성한 공론은 군주나 특정집단이 정국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한국적 정당정치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유생은 상소를 올리기 전 굳은 결심을 하고 나서야 했다. 유배는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공론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수시로 변하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요동치는 정국을 보며, 그런 조상의 기개와 소신이 그리운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김문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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