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김남일 신드롬

  • 입력 2002년 7월 11일 18시 41분


박정희 정권 때 젊은이들의 우상으로는 노동운동가 전태일과 가수 김민기가 돋보인다. 이들이 떠오른 것은 물론 민주화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80, 90년대에는 세계 무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한국인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마라토너 황영조, 야구선수 박찬호, 골프선수 박세리, 지휘자 정명훈,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그들이다. 이 같은 현상은 시대적 조류인 세계화 흐름과 맞물려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월드컵이 끝난 뒤 새로운 우상이 등장했다. 축구선수 김남일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은 김남일 말고도 여러 명 되기 때문에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축구실력 이외의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 요소란 과연 어떤 것들일까. 먼저 꼽히는 것이 반항적인 외모와 언행이다. 염색 머리와 오뚝한 콧날 등 외모에서부터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소신과 반대되는 일에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한 인상을 풍긴다.

▷그의 언행은 지나치게 솔직한 느낌이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기자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능적인 파울 연마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월드컵 4강 진출이 확정된 다음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눈물어린 호소를 받아들여 가출 생활을 청산한 정(情)에 약한 면모도 전해졌다. 이 같은 모습들은 일단 TV를 통해 전해진 간접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기성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과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따듯하고 순수한 내면을 지닌 그의 캐릭터에 많은 젊은이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축구선수로서 그가 맡았던 ‘궂은 역할’도 인기의 한 요인이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힘들고 귀찮기 때문에 다들 싫어하는 역할이 월드컵 때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대중이 특정한 인물에 열광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김남일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스타일의 인물이 별로 없다는 얘기도 된다. 수비수로서의 ‘악역’만 해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설 축구선수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출한 김남일을 눈물로 설득한 그의 아버지가 같이 화제에 오르는 것도 자식에 대한 그만한 책임감을 지닌 아버지들이 별로 없기 때문은 아닐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시대가 우상을 만들어낸다는 옛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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