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지구촌 표정]“축구마저…” 아르헨 끝모를 좌절

  • 입력 2002년 6월 12일 18시 51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 레스토랑에서 경기를 지켜본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이 절망하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 레스토랑에서 경기를 지켜본 아르헨티나 축구팬들이 절망하고 있다.

12일 아르헨티나가 끝내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밤새 뜬눈으로 TV를 지켜보던 아르헨티나 국민은 긴 한숨을 쉬었다. AFP통신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 전체가 우울하고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고 침통한 분위기를 전했다.

축구는 아르헨티나의 국기. 62년 이후 40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경기에서 한번도 16강 진출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난해 12월 국가부도상태에 빠져 7개월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날 패배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줬다.

아르헨티나의 유명 정치평론가인 마누엘 모라 아라우호는 경기 전 “경제위기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최소한 우린 축구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축구마저 아르헨티나를 외면했다. 9일에는 86년 이후 월드컵 경기에서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숙적 잉글랜드에 무릎을 꿇어 치욕이 겹쳤다.

아르헨티나 중부 도시인 코르도바 도심에서는 경기 결과에 화가 난 150여명의 축구팬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병으로 건물의 유리창 등을 깨는 등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경찰은 고무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 35명을 체포했다.

무역상을 하는 세르지오 바리체(29)는 “대표팀 선수들이 엄청난 돈을 버는 만큼 첫 경기부터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한다”며 선수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시간이 이른 탓도 있지만 첫 경기에서 나이지리아를 격파했을 때 울려퍼졌던 나팔과 북의 요란한 소리는 아련한 기억으로 남았다. 커피를 들이켜며 오전 3시반 경기를 시청했던 대부분의 국민은 경기가 끝난 뒤 깊은 실망감과 지친 심신을 추스르며 출근길과 등굣길에 나설 준비를 했다.

홍은택기자 enutack@donga.com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英 “지옥에서 빠져 나왔다” 전국 들썩▼

“죽음의 조를 넘었다.”

오전 7시반(현지시간)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영국식 선술집인 펍(Pub)에 모였던 영국인들은 경기가 끝나자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11일 아일랜드가 16강에 진출한 것으로도 축제를 벌였던 런던 축구팬들은 자국팀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다. 평소 출근길로 붐비던 오전 7시반∼9시는 ‘사상 가장 조용했던 러시아워’(영국자동차협회 스티브 업셔 대변인)였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자 쥐 죽은 듯 고요했던 거리는 때늦은 출근 전쟁터로 변했다.

펍에서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관람한 일부 직장인은 직장에 도착한 뒤에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부 극성 축구팬은 출근을 늦추거나 포기한 채 트래펄가 광장으로 달려가 ‘잉글랜드 만세’를 외쳤다. 트래펄가 광장에는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 동상 옆에 잉글랜드팀의 주장 데이비드 베컴의 밀랍인형을 가져다 놓았다.

이날 영국에서는 2만5000개의 선술집에서 600만명이 경기를 관람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오전 7시부터 여는 펍에 가기 위해 ‘새벽 러시아워’가 있었다고 주 영국 한국대사관 황현탁(黃鉉卓) 홍보관은 전했다. 일부 펍에서는 맥주와 함께 먹는 아침메뉴로 ‘에그와 베이컨’ 대신 ‘에그와 베컴’을 내놓았다고 영국 선지는 전했다.

학교와 회사는 등교, 출근시간을 늦췄으며 영국 북서부의 울버햄프턴에 있는 한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오늘이 학교 개교 이래 가장 결석률이 낮았다”고 전했다. 상당수의 감옥에서도 죄수들에게 아침 TV 시청을 허용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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