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이런 축구 저런 정치

  • 입력 2002년 5월 31일 18시 40분


시작은 항상 설렘을 동반한다. 월드컵은 어젯밤 그렇게 두근거리는 세계인의 가슴 속에 막을 올렸다. 이번 월드컵에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물론 이 축제의 절반이 한반도에서 열린다는 감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하는 것은 몇 차례 평가전에서 보여준 한국대표팀의 높아진 기량이 혹 이번 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90여분 동안 줄곧 긴장과 환희를 번갈아 맛보게 해 준 세계 최강 프랑스와의 평가전이 특히 그랬다. 비록 마지막 몇 분을 지키지 못해 역전패하기는 했지만 이날 우리 선수들은 세계 최강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대이변을 연출할 뻔했다.

▼축구가 정치보다 좋은 이유▼

오늘 화두로 삼고자 하는 말은 경기가 끝난 후 거스 히딩크 감독이 던진 자평이다. “막판 집중력이 떨어져 골을 내준 것은 유감이다. 마지막 순간을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는 것은 바로 그 팀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상사 여러 곳에 상징적 교훈을 주는 대단히 인상적인 분석이다.

이 말을 우리 정치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정권이 임기 후반기에 들어선 이후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각종 게이트로 스스로를 해치고 망치는 모습에서 우리는 히딩크 감독이 말하는 정권의 수준을 읽게 된다. 이 정권이 들어선 이후 4년 동안 한국축구대표팀의 기량은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국내 정치의 능력과 도덕적 수준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퇴보해 온 느낌이다.

한국대표팀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히딩크 감독의 역할이 있었지만 정치인들에게 잘못을 일깨워 주고 수준을 높여 줄 정치 지도자의 수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한계였다. 선수들은 부단하게 국제 경기를 통해 스스로의 약점을 깨닫고 상대의 강점을 터득해 왔지만 국제 경쟁력이 필요 없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오로지 감언이설의 혀와 협잡꾼 수준의 비속어를 말하는 입으로 우물 안 싸움에만 매달려 왔을 뿐이다.

서울시장 후보가 뉴욕시장 후보와 목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것도 아니요, 경기도지사가 뉴저지 주지사와 자리를 놓고 경합하지 않는 것처럼 대선에서도 국제 경쟁은 요구되지 않는다. 학자나 기업이나 축구선수나 모두 필사적으로 국제적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오로지 서로의 발목 잡기 게임에만 몰두해 파울하는 기술만 향상시켰을 뿐이다. 세상에 우리 정치만큼 룰도 없고 틀도 없는 게임이 어디 있을까. 국민은 그렇게 혐오스럽고 분노만 자아내게 하는 정치게임 대신 정정당당한 축구경기를 훨씬 더 선호한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일까. 미국의 경제학자 허버트 스타인이 쓴 ‘대통령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은 언제나 희망을 안겨 준다. 당선자 측은 마치 잘 깎은 연필과 새 공책을 갖고 학교에 가는 입학식 날의 신입생 기분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권으로 세상이 달라지고 구 정권의 어려운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꿈 같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국민의 정부에도 그렇게 가슴 벅찬 희망의 날은 있었다. 당선이 발표되던 날 동교동계 가신그룹 인사들은 상기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어깨동무를 하고,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대통령 만드는 일에 성공한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정권 아래서 선출직 이외의 어떤 자리에도 오르지 않겠다.” 그 자신들은 스스로 ‘어떤 자리’에도 안 올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좋은 자리에는 낙하산을 끝도 없이 내려보냈고 웬만큼 먹고 살 만한 이권에는 빠짐없이 달려들어 스스로 풍요로운 나날을 창출해 냈다. 그래서 그들의 기회독점에 식상한 여타 많은 국민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히딩크같은 정치인 보고싶다▼

자리에 안 오르는 것만이 대수인가. 집권 세력에 주어지는 어떠한 특권도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한 이 말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느냐 말이다. 배부른 맹수에게 사냥의 집중력을 기대하기 어렵듯 온갖 게이트와 매관매직으로 넉넉해진 집권당 인사들에게 임기 말까지 집중력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 같다. 결국 이 정권은 후반전 내내 실점만 거듭하면서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소리를 맥없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월드컵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에 정치판에서는 새 대통령을 뽑을 선거전도 무르익어 가고 있다. 축구 대표팀에 16강 이상의 선전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간절한 심정으로 부패한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 대표팀의 등장도 기대해 본다. 누가 집권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오직 집중력을 막판까지 유지하는 수준 높은 정권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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