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때 그이야기]제11회 아르헨티나대회<하>

  • 입력 2002년 5월 6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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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월드컵에서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확정되자 아르헨티나 응원단이 축포를 터뜨리며 열광하고 있다.
11회 월드컵에서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확정되자 아르헨티나 응원단이 축포를 터뜨리며 열광하고 있다.
1966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는 12년 뒤에 열릴 제11회 월드컵 개최지로 아르헨티나를 결정했다.

집행위는 또 12회(스페인)와 무려 20년 뒤에 열릴 예정인 13회 월드컵(콜롬비아)까지 모두 3개 대회 개최지를 한자리에서 확정해 버렸다. 당시 ‘제2의 유럽’으로 불릴만큼 정치 경제적 발전을 구가중이던 남미가 2개국이나 선택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FIFA의 결정이 성급했던 탓일까. 66년 FIFA 집행위가 결정한 3개 대회중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월드컵은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11회 월드컵을 불과 2년 앞둔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정권을 뒤엎는 쿠데타가 발생, 개최지 변경 주장이 끊이지 않았고 콜롬비아는 경제난으로 아예 대회 개최권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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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월드컵에 대한 전 세계의 우려는 높았다.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는 정치범은 물론 민간인까지 포함된 수만명을 학살했고 반대파들은 반정부 게릴라단체를 결성, 물리적 저항에 나서는등 참가국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 군사정부가 월드컵을 34년 이탈리아월드컵처럼 또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우려도 개최지 변경 주장에 힘을 실었다.

대회 개막직전까지 아르헨티나로부터 개최권을 반납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음은 물론이다.

월드컵을 다른 국가에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다급해진 군사정부는 반정부단체와 보조를 맞춰 ‘각국 출전선수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FIFA는 그제서야 개최지 변경은 없다는 것을 공식 확약했다.

FIFA의 발표 이후에도 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아르헨티나 내부의 혼란은 계속됐다.

국가재건위원회 지도자가 기자회견 도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개막을 1주일 앞둔 78년 5월25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치된 월드컵 프레스센터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폭발사고는 각국의 축구 스타들이 국제사면위원회에 정치범 석방을 탄원하고 나서자 군사정부가 ‘겁주기용’으로 자작극을 일으킨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폭파정보를 미리 입수한 경찰이 각국 기자들을 대피시킨 덕에 경찰 1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기자들의 참사는 면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아르헨티나월드컵의 위험성이 전세계에 알려졌고 세계적인 스타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와 베켄바워(독일)는 공식적으로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대회기간중의 심판 매수를 통한 불공정 판정이 이어지며 월드컵사에 길이 남을 ‘추악한 월드컵’으로 기록되는 오명을 남겼다.한편 2그룹에 속해있던 축구변방 튀니지는 1회전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3-1로 꺾는 파란에 이어 독일과 무승부(0-0)을 기록하는 저력을 발휘하며 이후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돌풍을 예고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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