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영/대통령 탈당논의 늦었다

  • 입력 2002년 4월 28일 20시 23분


정치는 시간의 예술이다. 아무리 좋은 정치적 결단 내지 선택도 적절한 때를 놓치면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김대중 정부는 집권 4년여 동안 여러 문제에서 적절한 처방의 시기를 놓쳤다. 그 결과 호미로 막아도 될 문제를 가래로도 못 막는 것으로 키우고 말았다. 옷로비, 가신 척결, 아들 비리의혹 문제 등이 대표적 예다. 그런데 최근 또 하나의 문제가 때늦게 거론되고 있다. 김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문제다. 이것 역시 집권 초에 이루어졌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탈당을 논하는 것은 무책임 정치의 표본으로 여겨지거나 정략적 발상으로 오해될 뿐이다.

▼˝무책임˝˝정략적˝비판 일듯▼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집권당을 떠나는 일은 드물고 부자연스럽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그의 당은 국민으로부터 헌법에 보장된 시기 동안 국정을 책임지라는 위임을 받은 것이다. 이 기간의 국정운영 결과에 대한 채점은 다음 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루어진다. 국민은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채점 결과를 토대로 그 당의 후보에게 국정운영의 책임을 계속 맡길지, 다른 당의 다른 후보에게 넘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대통령은 다음 선거가 있을 때까지 집권당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 동안 김 대통령이 집권당을 떠날 명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우선 집권 초 경제위기를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당적을 버리겠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당시 집권당인 국민회의는 공조관계에 있던 자민련과 의석을 합쳐도 원내 소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초당적 입장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아마 야당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국민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쳤다. 그는 DJP공조에 집착했고, 의원 영입에 골몰했다.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DJP공조가 깨진 상태에서 치러진 2000년 4월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탈바꿈한 민주당은 원내 다수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다시 집권당이 소수파로 전락한 것이다. 김 대통령은 이때라도 민주당을 떠나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과업을 완수하겠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야당도 반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국민도 호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DJP공조를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그는 또 한차례 실기했다.

임기를 10개월 남겨 놓은 지금 대통령 탈당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때는 너무 늦었다. 만약 지금 그것을 단행한다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애초 김 대통령이 당적 포기를 거부한 명분이 책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임기 말에 와서, 그것도 아들 문제 때문에 정국이 엉클어질 대로 엉클어진 상황에서 탈당한다면 그것은 국민에게 무책임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위로 보일 뿐이다. 탈당할 경우 레임덕은 가속화될 것이고 심할 경우 ‘식물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초래될 국정운영의 난맥상은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아울러 대통령 탈당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정략적 발상이 아니냐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이 논의의 부상 배경에는 아들 비리의혹과 그로 인한 민심이반 현상이 있다. 이것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에게 부담을 주고 있고 또 목전에 다가온 6월13일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과 노 후보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 같자 민주당 일각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서 대통령이 탈당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치에 관여하는 행위다. 이것은 작년 말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으며 김 대통령이 한 정치불간섭 선언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중립적 인사개편 전제돼야▼

결론적으로 김 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하지 않는 것이 옳다.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만약 그래도 해야겠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내각은 물론이고 국가정보원이나 검찰, 경찰과 같은 권력기관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의 핵심 부서까지 모두가 공감할 만한 중립적인 인사로 개편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조건의 충족 없이 대통령만 민주당을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채우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통령은 시간이란 문제를 유념해야 한다. 세월은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을 선용하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시간의 보복뿐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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