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3000억원 장학재단

  • 입력 2002년 4월 25일 18시 32분


삼영화학 이종환 회장이 설립한 기금 3000억원의 장학재단은 국내 기부문화에 새로운 획을 그은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베풂의 미학’을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누구를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난에서 탈출한 것이 불과 수십년 전의 일로 남을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등 많은 역사적 격동을 겪은 탓인지 아직 혈연 위주의 사고방식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거액을 선뜻 사회에 내놓은 재단 창립자의 ‘결단’은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기부문화라고 하면 흔히 미국의 록펠러나 카네기재단, 최근에는 빌 게이츠가 만든 200억달러 재단을 머리에 떠올리며 외국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도 전통적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큰 미덕으로 생각해 왔다. 조선 후기 전국 최고 부자로 유명했던 경주의 최부잣집은 대대로 ‘사방 100리 안에 밥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수입의 3분의 1은 항상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라’라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또 밥을 짓는 저녁시간, 굴뚝에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집을 찾아내 은밀하게 쌀을 보내 끼니를 잇게 하는 부자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번 장학재단 이외에도 최근 자신의 재산을 공익을 위해 기꺼이 내놓는 흐뭇한 일들이 늘고 있다. 기부문화는 어느 누가 강요해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며 벽돌을 하나씩 쌓아 집을 짓듯이 조금씩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모범적인 사례가 많이 나타날수록 우리의 남을 돕는 전통이 빠른 시일 내에 되살아날 수 있다. 이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사람들은 역시 지도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고구마줄기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는 최근의 집권층 비리를 보면 실망스러울 뿐이다.

▷새 재단은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금의 규모가 커서 유학생 100명에게 연간 최고 5만달러씩 지원할 만큼 기존 장학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파격적이다. 빌 게이츠 같은 한 사람의 천재가 수십만, 수백만명을 먹여 살리는 세상이니 인재 양성이라는 운영 방향은 시기적절하다. 해외의 저명 재단처럼 세계적인 인재, 그 중에서도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인재를 길러내는 역할을 기대해 본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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