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막내린 ‘좌파정권 실험’

  • 입력 2002년 4월 12일 17시 55분


남미에서 좌파 정권의 실험이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세계 제4위의 석유수출국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12일 사임함으로써 집권 3년여만에 좌파정권이 막을 내렸다. 73년 역시 좌파였던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된 바 있다.

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은 공교롭게도 차베스 정권을 출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노조였다. 노동자총연맹(CTV)은 최대 상공인연합회인 페데카메라스와 연대해 사흘간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번에 과도정부 수반이 된 페드로 카르모나는 페데카메라스의 회장. CTV의 카를로스 오르테가 위원장은 “베네수엘라를 구하기 위해 악마(기업인)와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눈엣가시로 여겨왔다. 미국은 하루 170만배럴의 원유를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으나 차베스 대통령은 공공연히 사회주의적 정책을 표방하면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정권 붕괴의 발단은 차베스 대통령이 지난달 국영석유회사(PDVSA)의 새 이사진에 자신의 측근을 기용한 것. 이 회사 경영진은 4일 차베스 대통령이 회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면서 강하게 반발, 작업 중단을 지시했고 차베스 대통령이 작업 중단에 참여한 근로자를 해고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6일 오르테가 위원장이 총파업을 선언, 정면 충돌로 치달았다. 15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카라카스의 대통령궁을 포위한 가운데 군의 총격으로 최소한 13명이 숨지는 유혈극이 벌어지자 차베스 대통령의 유일한 원군인 군부마저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의 운명은 끝나고 말았다.

차베스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에프라인 바스케스 벨라스코 육군참모총장은 12일 TV에 나와 “대통령 각하, 저는 끝까지 당신께 충성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고 반기를 들었다.

차베스 정권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불도저식 정권 운영에서 비롯됐다. 정부와 국영기업의 요직에 군 출신 인사와 현역 장교를 임명해 왔고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개혁사업인 ‘볼리바르 2000운동’에 군을 동원함으로써 군을 사병화(私兵化)하고 마침내 군조직은 부정부패에 오염됐다.

노조에 대해서는 CTV를 친정부 성향의 볼리바르 노동자전선(FBT)으로 대체하려다 실패함으로써 CTV 산하 100만 조합원을 반정부세력으로 만들어버렸다.

49개의 사회주의적 개혁법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초래했으며 가톨릭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해 차베스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은 확대됐지만 정치 기반은 계속 축소돼왔다.

향후 베네수엘라의 정정은 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 정권의 집권 3년 동안 야당은 무력화됐다. 일단 상공인연합회와 노조 그리고 군부 등 3대 세력의 과도정부가 예상되고 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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