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10년뒤 뭘로 먹고사나]한국경제 시스템 확 바꿔?

  • 입력 2002년 3월 31일 20시 41분



사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쇼(CES)에서 개막식 기조연설을 했다. 작년까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하던 연설이었다. 동양 기업인으로는 진 사장이 처음.

1985년 그가 반도체로 미국과 일본을 넘어서겠다며 IBM 왓슨연구소를 박차고 나온지 17년. 당시 지도교수와 동료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지금 삼성전자는 D램 분야에서 부동의 세계 1위가 되었고, 반도체 전체에서도 4위로 올라섰다.

메모리분야 세계 1위 삼성전자는 요즘 고민이다. 한국 총 수출의 10∼15%를 차지하는 반도체는 90년대 한국을 먹여 살려온 1등 공신. 그러나 중국이 코앞까지 따라왔다. 중국은 최근 4년 동안 반도체 수출이 연간 48%씩 늘었고 올해말 쯤 한국과의 기술 차이가 3∼5년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인텔이나 IBM이 메모리를 후발 기업들에 넘겨주고 고부가가치의 비메모리에 주력한 것처럼 삼성도 비메모리를 점점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비메모리는 메모리와는 차원이 다른 기초과학과 설계력, 콘텐츠를 요구한다. 한 기업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벅찬, 인재와 기술력 등 한 단계 높은 인프라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잡기’ 한계〓삼성전자의 고민은 그대로 한국경제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40년 동안 일본 등 선진국을 본 떠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해왔지만 이제 ‘따라잡기’ 전략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규모면에서 세계 13위(2000년 기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기업의 경영효율성과 기술력에서는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수출경쟁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출은 한국경제의 생존 조건.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은 1970년 14%에서 2000년 44%로 높아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 수출시장에서 한국의 시장점유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중국과 ASEAN 등 후발 개도국들의 비약적 성장 때문이다. 기술력은 아직 선진국에 못 미친 반면 가격 면에서는 후발 개도국을 당할 수 없어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무역투자실장은 “1달러어치를 수출하면 0.4센트만 손에 들어오는 취약한 수출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립식 대량생산에 의존하는 한국의 수출산업은 수익성이 낮을 뿐 아니라 세계적 과잉설비, 과잉생산으로 통상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다.

▽허약한 기업 경쟁력〓한국 기업의 기초체력 역시 허약하기 짝이 없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이병남 부사장은 “한국 기업들은 6시그마 공급망관리(SCM) 고객관계관리(CRM),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첨단 유행 경영기법은 뭐든지 도입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성과를 거둔 기업, 대표적으로 본받을 만한 기업은 없다”고 단언했다. 낚싯대 하나를 만들어도 글로벌 경쟁력이 필요한 시대에 연구개발부터 생산 마케팅 물류 등 기업 각 분야의 세계적 경쟁력은 아직 한참 낮은 수준이라는 것.

BCG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업종별 평균수익률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 평균 3.5% 이상 격차가 있으며, 30대 그룹 총 투자의 58%가 자본비용 이하의 수익성을 나타냈다(2000년 기준).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선진국보다 20%가량 떨어진다.

▽1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살까?〓삼성종합기술원 손욱 원장은 “한국은 기술혁신을 해야 할 10년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부 주도로 중화학공업 등에 설비투자를 집중하는 ‘투자형’ 성장을 해왔다면, 90년대는 이노베이션을 통해 다음의 성장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90년대가 ‘잃어버린 10년’이 됐다는 것이다.

손 원장은 ‘무엇을’ 찾기 전에 ‘어떻게’ 할 것이냐에 지금부터라도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학 물리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기초 과학기술을 기업에 제공할 연구중심 대학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피츠버그시는 카네기멜론대학을 중심으로 철강도시에서 첨단소재 및 소프트웨어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도 기업 연구소 대학이 모인 산업 클러스터링(clustering)이 기술혁신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

시스템이 바뀌어야 전통산업의 이노베이션도, 신산업의 발달도 가능하다. 앞으로의 산업은 전통산업과 신산업, 신산업 사이의 퓨전과 시너지로 나아간다.

▽경제 발목잡는 사회〓그러나 고비용의 정치와 행정, 대립적인 노사관계, 창의성을 살리지 못하는 교육, 윈-윈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국민정서 등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각 분야에 도사리고 있다.

손 원장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의식구조를 상공농사로 역전시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주장했다. ‘공’ 앞에 ‘상’이 있는 것은 기술이 고객 또는 시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 중국은 전국의 수재들이 이공계로 모이는 데 반해 한국은 과학기술에 너무 소홀해 걱정이라는 것이다.

산업연구원 김원규 연구위원은 “한국이 현재의 기술 자본 인적자원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일본이나 동아시아 지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기업인수합병과 선진기술이전 등 산업 경쟁력을 높일 촉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열 개를 얻고 한 개를 잃어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국민, 조정 능력 없는 정부, 인기에만 눈이 어두운 정치권이 한국경제의 전환을 막고 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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