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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3월 29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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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말하자면 한 그릇의 수제비를 뚝딱 먹어 치운 뒤의 개운함이라고 할까? 특별한 재료나 양념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대로의 맛을 내며 또 더 나은 맛을 바랄 필요도 없는, 게다가 약간의 포만감까지 가질 수 있기에 더 좋은 그런 책이라고 하면 어떨까? 280쪽의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에다 굵직굵직한 활자로 전혀 눈의 피로를 주지 않기에 금방 읽어버릴 수 있는 고만고만한 분량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아시아 5개국의 격동하는 현대 정치변동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권해 봄 직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33년 간의 수하르토 체제(인도네시아), 36년 째 계속되는 인민행동당 체제(싱가포르), 26년 간의 박정희·전두환 체제(한국), 38년 간의 국민당 일당체제(대만), 21년 간의 마르코스 체제(필리핀), 20년째 유지되는 마하티르 체제(말레이시아). 바로 ‘성장’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던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혹은 독재체제의 명패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 이 철옹성들은 필리핀의 ‘황색 혁명’을 필두로 민주화운동을 통한 연쇄적 체제변혁을 경험했다. 이어서 1997년 태국의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표면화된 경제위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한국 등으로 파급돼 아시아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90년대 말의 이 경제위기는 정치위기로 확산되어 수하르토 체제의 붕괴와 말레이시아에서의 지도자 세대 교체 갈등, 한국의 여야간 정권 교체를 가져왔고, 더 나아가 2000년에는 대만에서 국민당 지배를 종식시키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아시아 각국의 정치적 격변을 세 가지 주요 ‘발전가치’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국가통합, 개발, 그리고 민주화 등 시대 순으로 전개되는 사회발전과제에 따라 아시아 5개국의 정치변동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교의 축이 되는 키워드가 바로 ‘개발주의국가’와 ‘시민사회’이다.
아시아 5개국의 개발 독재를 추동한 축으로서의 ‘국가’와 민주화의 진지로서의 ‘시민사회’라는 대립적 배치를 통한 국가 간 비교 분석은 어쩌면 가장 분명하면서도 단순한 요인에 의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각 국의 정치변동과정을 참으로 시원스럽게 설명한다는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 국가의 정치과정에서 복잡성을 증가시킨 각 국의 정치문화, 특히 토착적 문화에 관한 설명이다. 또 그 연장에서 ‘시민사회’의 복잡성을 너무나 단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심층적인 분석을 요구하는 독자층보다 오히려 아시아 각 국의 정치변동을 적절한 수준에서 정리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내용을 갖춘 것일 수 있다.
한 두시간의 명쾌한 강의를 떠올리게도 하는 이 책은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까지 덤으로 던지고 있다. “아시아 정치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화’보다도 ‘민주주의의 정착’이고 그 임무는 바로 시민사회에 있다”는….
조대엽 고려대 교수 사회학 dycho@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