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2년 1월 29일 13시 11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일본에 '울트라니폰'이, 영국에 '훌리건'이 있듯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포터가 될 수 있도록 …"
지금은 그저 지나간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위 문장은 항간에 논란이 되었던 백의천사 응원단의 초창기 소개 문구 중 일부이다. 다를 아시다시피 위의 문장 대로라면 백의천사 응원단은 그들이 표방하는 종교적인 신념과는 상관 없는 불량한 조폭 집단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며, 붉은악마나 울트라니폰 또한 그런 조폭집단이 된다. 당연히 '훌리건'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의 문장은 수정 되었다.
월드컵은 6월에 열리지만 늦어도 5월 초에는 각국 선수들이 우리나라에 진지를 구축할 테고, 그들을 따라 움직이며 열광하는 팬들 또한 이미 5월을 전후해서 우리나라를 찾을 것이다. 개중에는 유난을 떨면서 훨씬 일찍 입국하는 패거리들도 있을텐데… 연초부터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개중에는 훌리건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심각하게 언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훌리건에 대한 대처와 경계에 앞서서 과연 그눔아들이 어떤 패거리인지부터 공감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붉은악마나 프로 팀 서포터스의 변질된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들을 바라보면서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훌리건에 대해 상당히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는 연초부터 훌리건으로 찍힌 인간들의 해외 여행 자체를 불허하기도 하며, 악명 높은 훌리건들의 신상 정보를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폭력이나 소동을 야기시킨 훌리건의 우두머리에게는 5년이 넘는 징역이 선고되기도 했으며,테러 진압 부대가 그들을 해산 시키고 체포하기 위해 동원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훌리건이란 놈들은 범죄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도 국제 범죄자와 다름 없는 취급을 받는 놈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훌리건에 대해서 '과격/열성 축구 팬'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훌리건에게 '팬'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훌리건에 대해 정의를 내려 달라고 한다면, '축구장 양아치 새끼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는 짓거리는 양아치와 다름 없고, 떼거리로 몰려서 쌈박질이랑 못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니 새끼들이다. ('새끼들'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훌리건에게 굳이 고상한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나라에서 훌리건과 비교될만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작년에 발생했던 서포터스간의 충돌이나 경기장 난입 사건을 두고 훌리건이란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훌리건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들이야 말로 잠시 이성을 잃은 (또는 의식적으로든 간에) 과격 축구팬일 뿐, 앞에서 말했듯이 양아치 새끼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를 보다가 흥분해서 자기 자제력을 잃은 나머지 폭력이나 기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그 개인의 자제력의 문제일 뿐이며 우발적인 '사고'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훌리건이란 놈들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놈 들은 경기장에 가기 전부터 싸우고 소란 피우고 때려 부술 궁리부터 한다.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축구 경기? 그딴거 솔직히 관심도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축구 경기는 열기 후끈하고 사람들 많이 모이고 적군과 아군의 구별이 분명하기 때문에 확실한 공격 대상을 제공해 주는 '전쟁터'를 제공해 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사전 준비에 의한 의도적인 폭력과 난동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우발적인 흥분이나 군중 심리에 휩쓸리는 축구 팬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훌리건 패거리 중에는 알딸딸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또라이들도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단순 무식 폭력만을 자랑하던 패거리의 후속 버전쯤 된다. 이들 역시 축구경기가 제공하는 훌륭한 싸움터와 사냥감, 그리고 군중들을 무대 삼아 자기들만의 광폭한 퍼포먼스를 즐기거나 알량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려고 한다. 물론 그 퍼포먼스의 끝은 항상 폭력으로 버무려진다. 이를테면 '신나찌주의'를 외치면서 축구장 분위기를 뽕발로 몰고 간 후 유색인만 골라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그런 성향의 어웨이 팀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식이다. 그 공격이라는 것은 항상 사전 준비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지며, 공격의 방법 또한 조폭들의 싸움과 다를 것이 없는 강도 높은 폭력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심판의 부당한 판정 때문에 승리를 빼앗기고, 그것이 분하고 원통해서 경기장으로 뛰어드는 사람과 그 사람에 휩쓸려서 함께 뛰어드는 사람. 또는 상대편 서포터스가 우리 팀을 자극하는 데에 열이 받아서 한 방 날리는 사람과 거기에 휩쓸려서 치고 받고 하는 사람. 꼴사납고 잘못된 짓거리, 그 자체만으로도 처벌이 마땅한 범죄 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훌리건이 아니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축구'와 '팀'이라는 것이 우선시 되었기 때문에, 그저 욕먹어 마땅한 짓을 한 과격 무식한 팬 정도로 쏘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경기장 보안을 강화하고 질서를 유도하고 경기 자체를 공정하게 이끌기만 하면, 굳이 이들이 경찰을 속이면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과격 무식하게 자신을 폭발 시키는 축구 팬 무리에 기생하면서 훌리건이 생겨난 부분은 마땅히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훌리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있다. 가령, 지난해에 있었던 대전 서포터스의 경기장 난입 및 수원 서포터스와의 충돌 문제를 다루었던 대다수 언론은 그들을 훌리건 취급했다. 서포터스간에 물리적 충돌을 하고 공공 질서를 깬 부분에 대해서는 마땅한 지적과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분명히 그들은 훌리건이 아닌 서포터스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올바른 판정을 내리고 경기장 안전과 질서 유지에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과연 그들에게 '양아치 새끼들'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가 말이다. 문제의 원인 속에는 이미 관중들을 흥분 시킬 수 있는 빌미가 있었으며, 헐렁한 경기장의 보안 수준으로는 흥분한 관중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 1차적인 점검 대상이었다. 그것은 결코 '훌리건화 된 서포터스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면에 TV를 통해 나타나는 외국 훌리건들의 모습은 상당히 낭만적인 면이 있다. 칼을 휘두르고 차에 불을 지르고, 차를 몰고 건물과 군중 사이로 돌진하는 등 훌리건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 영상이 모자란 탓일까? 대개는 훌리건 문제를 심각하게 이야기 하면서도 정작 TV에 나타나는 영상은 페이스 페인팅과 가발로 무장한 무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상대팀 버스를 저지하거나 선수들이 입장할 때 야유를 퍼붓는 모습이다. 경기장에서 정상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팬이 졸지에 훌리건이 된 셈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달 과정을 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훌리건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왜곡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따금씩 팬들에게서 나타나는 과격 무식한 행동이나 집단적인 충돌에 대해 다짜고짜 훌리건이란 표현을 쓴다거나, 반대로 어린 꼬마들이 훌리건에 대해 '멋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너무 가볍게 생각하기도 한다. 진짜 경기장에 훌리건이 나타났다면 언론에서 팬 문화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경찰이 동원되어 전원 연행한 후 우두머리는 사법 처리를 해야 한다.
이제 5월이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심심찮게 외국 축구 팬들을 보게 될 것이다. 축구장에 나타나기도 할 것이고 온갖 치장을 한 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닐 것이다. 월드컵 기간에는 각국의 서포터스들이 넘쳐날 것이며, 개중에는 충돌 또한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우리는 또 다시 충분한 준비 없이 훌리건과의 전쟁을 치를 것이다. 둘 중의 하나다. 훌리건이면 개 취급하고, 훌리건이 아니면 최대한 사건 예방에만 신경 쓰면 된다. 아쉽게도 우리는 훌리건에 대한 인식이 불분명한 상태이기 때문에 진짜 양아치들에게는 속수무책으로 관대한 반면, 약간의 과격 성향이 있는 축구 팬들에게는 오히려 지독하게 대할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훌리건은 축구 흥행과 발전의 최대 방해요소라는 점이다. 80년대 초반 영국 축구는 훌리건들에게 심한 몸살을 앓게 되면서 관중 감소와 경기력 저하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행여 훌리건에 대한 안일한 인식으로 한국 축구가 피해를 입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 축구는 아직 훌리건을 경계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훌리건에 대해 진지한 접근이 전혀 없는 상황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월드컵이 한국에 남기고 간 것 중 하나로 축구장 양아치 새끼들이 생겨서는 안된다. 아울러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것을 프로축구 경기에서 몸으로 보여줄 때, 그들의 실수를 훌리건의 난동으로 몰아세워서도 안된다. 그 속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사건들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지금 하지 않는다면, 월드컵 이후에 나타날 프로 축구 팬 문화의 급격한 변화가 한국 축구에 또 하나의 문제거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