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모두 타향인 것을

  • 입력 2001년 12월 24일 17시 43분


백제의 피가 천황가에 섞여 있다고 아키히토(明仁)일본 천황이 말했다. 월드컵 축구 공동개최를 앞두고 천황이 나서서 그런 연(緣)을 고백하는 것이 새삼스럽다. 천황가라면 이른바 만세 일계(萬歲一系)라 해서 신화에 이어진 핏줄로 믿는 일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사자 천황이 처음으로 터부를 깨고 나왔다.

과연 천황가에 대한 추앙과 신성시는 놀랍다. 천황의 발언을 보도하는 일본 언론도 ‘신(神)의 나라’ 국민들에게 혼란과 놀라움을 주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 간무(桓武)천황의 생모라고 속(續)일본기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는 대목은 생략해 버린다. 아사히 신문만 자세히 실었다.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이 온통 한반도를 비롯한 도래인의 혼혈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문물만이 아니라 인적 혈통 교류 역시 일본사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황실의 혈통만은 순수한 내림으로 믿으려 하고, 쵸센진(朝鮮人)이라는 말은 어둡고 비하하는 뉘앙스로 굳혀 놓았다. 그 차별 박해로 인한 한반도 출신의 고통과 피해는 되 뇔 필요조차 없다.

해협을 맞대고 이해(利害)를 달리하며 세월을 거듭하는 동안 서로 편견 악감정을 쌓아 온 것이다. 한국쪽에서는 임진왜란 일제침략 식민지배를 들어 당연히 반일 감정이 들끓는다. 일본쪽에는 원나라 침략때 고려가 원구(元寇)의 앞잡이 였다는 인식에서부터, 혐한(嫌韓) 반한 감정이 스며 있다. 이웃이라는 것은 그처럼 뗄수 없는 인연과 악감 같은 것을 교직하면서 살아가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북쪽 이웃 중국과 우리 사이에도 그렇다. 남녁 섬사람들을 향해 왜놈이라고 하듯이 북으로는 되놈이라고 한다. 코를 맞댄 만주 지역과의 감정은 더욱 복잡해서 못된 짓 하는 자는 호래자식이라는 식으로 좋지 않은데 호(胡)자를 붙인다. 만주에서는 망나니 짓 하는 자를 고려놈 이라고 한다. 살을 맞대고 부딪치고 다툼이 빈발하면서 응어리가 깊어 진 것이다.

한 중 일 세나라 사람들이 태평양 건너 멀리 미국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황인종은 백인 흑인에 이은 삼등시민으로 묶인다. 황화(黃禍)라는 걱정도 한다. 피부색 편견에 사무친 흑인들 조차 ‘옐로우’를 비하한다. 동양계 이민 수대를 거쳐 미국문화에 동화되고 영어가 몸에 배도 ‘바나나’라고 놀린다. 속은 하얗지만 겉은 노랗다는 의미다. 바나나라는 말에 한중일 출신 구분은 없다.

오해와 갈등의 동심원(同心圓)을 넓히면 이렇게 끝이 없다. 타관(他關) 타향 사람을 배척 경계하면서 끼리 끼리 뭉치고 응집력을 높이는 가혹한 짓이 인간의 본성이고 세상사의 법칙일까. 거기에는 이성 합리보다는 감성 충동 같은 것이 작용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타관사람 이방인을 짓밟고 핍박하며 동류의식으로 똘똘 뭉친다.

동심원을 들여다 보면 우리 내부의 타향배척, 지역 갈등이 무섭게 똬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타향살이 인구가 44.4%다. 통계청에서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를 해보니 무려 2013만8000명이 출생지가 아닌 타향에서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이렇게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비좁은 땅덩어리에서 고향 타향은 따로없는 셈이 아닐까.

우리는 교통 통신 물류 왕래의 가속화로 경제의 용광로 속에 녹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지역으로 갈려 갈등과 편견 증오의 불길을 태운다. 어떤 이들은 특정지역의 액센트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고 토로한다. 나라를 잃고 일제치하에 신음하던 시절에도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등은 날마다 지역감정으로 우리 끼리 싸우는 것을 개탄했다. ‘어찌하여 상해 땅에서 까지 서북 기호 영남으로 갈려 이지경으로 싸우고들 사느냐’고.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래의 영호남 갈등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년후 대통령 선거를 지역표밭이 좌우 할 것이라는 걱정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내년 봄의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또 면단위 군단위로 갈리는 소(小)지역주의가 우려된다. 인연 이라면 5천년 단일민족을 자랑해온 우리다. 모두가 타향인 것을 누가 고향만 우기는가.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의 국익을 위해 1500년 전의 인연을 말하는 일본 천황도 있지 않는가.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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