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세탁(중)]돈벌이 수단없어 조선족 폭력배와 결탁

  • 입력 2001년 11월 16일 18시 15분


9일 오후 중국 옌타이(煙臺)의 한 호텔. 1996년 한국에서 수억원대의 금융피라미드 사기 사건을 저지르고 중국으로 달아난 뒤 각종 밀수에 개입하고 있는 L씨(41)가 다른 한국인 4명과 함께 호텔에 들어섰다.

L씨는 조선족 조직폭력배 J씨와 마주치자 들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달아났고 곧바로 J씨의 추격이 시작됐다. L씨는 3년 전 J씨에게서 5만위안(약 800만원)을 월 20%의 이자를 주기로 하고 빌린 뒤 갚지 않은 채 도망다니고 있던 상황.

격투 끝에 붙잡힌 L씨는 J씨에 의해 일단 중국 공안(경찰) 분실로 끌려갔다가 공안의 묵인 하에 J씨에게 넘겨졌다.

L씨는 얼마 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달아났다. 그의 가방에서는 위조 중국 신분증과 여권이 나왔다.

국적 세탁자들과 조선족 폭력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공안과 유착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족 폭력배는 한국인 범법자들이 국적을 세탁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기도 하고 각종 사건을 대신 해결해주는 ‘해결사’ 노릇도 하고 있다.

▼관련기사▼

- <上>'진짜신분증' 3일이면 뚝딱
- <中>돈벌이 수단없어 조선족 폭력배와 결탁
- <下>외국인 행세 버젓이 재입국

▽누가 왜 국적을 세탁하나〓99년 3000만원을 횡령한 뒤 중국에 온 전직 은행원 K씨(42)는 2년째 위조 중국 신분증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횡령액이 많지 않아 귀국해도 공항에서 곧바로 체포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체포될 게 두려워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적 세탁자들은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기소중지자들로 알려졌다.

강도 마약 등 강력범보다는 사기 횡령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등 금융 관련 사건을 저지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소중지자도 출국금지 조치만 내려져 있지 않으면 자유롭게 해외를 오갈 수 있다.

물론 기소중지 전에 여권을 만들어 놓은 경우에 한해서다. 해외로 도피한 기소중지자가 귀국한다고 해서 곧바로 공항에서 붙잡히는 건 아니다.

해외 도피자들도 이를 알지만 자신의 범죄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알지 못해 귀국을 꺼리고 있다.

또 금융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많기 때문에 이들에게 발견될 것을 우려해 해외에 눌러앉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2의 범죄인생〓국적 세탁자가 마땅한 직업이나 돈벌이 수단을 갖지 않은 채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다.

이 때문에 사기 등 다른 범죄에 빠져들기 일쑤다. 한국인 사업가나 조선족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각종 밀수에 간여하는 게 일반적인 행태.

최근 급증하고 있는 조선족 불법 송출(속칭 ‘돼지 몰이’)에도 대부분 국적 세탁자들이 관련돼 있다는 것이 현지 범법자들의 증언이다.

현지 범법자인 H씨(45)는 “2년 전 국적 세탁자가 개입된 사기단이 옌타이에서 조선족 30여명을 태우고 한국으로 떠난 뒤 상하이(上海) 근처 해안에 이들을 내려주고 상하이를 ‘인천’이라고 속여 돈을 가로챈 사건도 있었다”고 말했다.

<최호원·민동용기자·옌타이(중국)〓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중국인 逆사기]한국인 약점 이용 재산 뺏고 하수인 취급▼

94년 중국으로 도피해 국적을 세탁한 K씨(53)는 대형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다가 조선족 동거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K씨의 약점을 잘 아는 동거녀가 식당이 자신의 명의로 돼 있는 것을 이용해 식당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

K씨는 우여곡절 끝에 동거녀에게 상당한 금액을 주고서야 식당을 되찾았다.

또 다른 국적 세탁자 L씨(53)는 녹용 밀수 등을 하다가 낭패를 봤다.

그의 약점을 잘 아는 중국인이 공안에 밀고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된 것.

이후 L씨는 자신을 밀고한 중국인의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며 힘겹게 살고 있다.

한국인 범법자 K씨(46)는 “중국 사기단은 한국인 국적 세탁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빈털터리나 도망자 신세로 만든 뒤 마약이나 총기 밀매 등 자신들의 범죄 하수인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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