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기숙/민주당 체질혁신 나서라

  • 입력 2001년 11월 9일 18시 42분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담임선생님의 묵인 하에 동급생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반장 엄석대가 새 담임선생님을 만나 권력을 상실하면서 교실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정당운영 1人에 좌우▼

엄석대의 비리를 캐는 데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던 담임이 정작 새로운 지도체제를 갖추기 위한 학급 아이들의 숱한 시행착오에 대해서는 철저히 방관한다. 평소 민초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는 작가가 이 대목에서만큼은 대중에 대해 신뢰를 보내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당분간 민주당에 권력 공백상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자율적인 정당운영을 경험하지 못한 당직자들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불안해 한다. 이해관계와 의식의 차이로 한 학기를 소모하는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상상외로 많은 시간이 허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서로 다투고 따지고 부대끼면서 자정능력을 길러 가는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민주당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민주당이 불필요한 혼란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10·25 재·보선에서 민주당의 참패가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권위주의 유산과 그 유산의 수혜자인 김 대통령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정치를 상극의 정치, 대권 중심의 정치로 만든 것은 권위적 정당구조다. 정당이 민생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 배후에는 총재 중심의 정당정치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 괴물에게 양분을 공급해준 것이 바로 지역주의다.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둔 상태에서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민주정당을 향한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 그 동안의 실수를 일거에 만회할 만 하다.

김 대통령은 취임 직후 비교적 쉽게 국정운영에 임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라는 국가적 환란은 국민을 일치단결시켰고 김 대통령의 독단적 리더십은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돋보였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소수정당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만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물론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비서실장을 내세워 기득권 껴안기에 나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이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치권의 개혁이었다. 과두적 정당체제의 총재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의 권한을 축소하는 정당개혁에 나서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득권의 눈치를 보느라 관료제의 개혁을 철저히 하지 않은 것도 최대의 실수였다. 결국 김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에 기여했다 소외된 집단으로부터는 물론 좌우로부터 협공을 받았다.

사면초가에 몰린 김 대통령은 이 모든 책임을 언론의 탓으로 돌렸다. 정권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철저히 객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사람은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더 가혹한 법이다. 하지만 연이은 권력층 비리의 탓을 언론으로만 돌리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소설에서야 국면의 전환이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실제로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할수록 믿을 것은 내 식구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김 대통령은 자기 사람을 심다가 번번이 쇄신 기회를 놓쳤다. 결국 김 대통령이 막다른 골목에서 최후의 승부수를 빼든 것이 총재직 사퇴인 것이다.

▼총재제도 없애야▼

사실 민주당이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시간이 충분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얼마나 단단히 각오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 속의 담임처럼 김 대통령은 검찰중립이나 특검제 등을 통해서 권력형비리를 캐는 데에는 철저히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러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 것과 같이 민주당이 자율정당으로 태어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측근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시행착오의 시간만을 연장할 뿐이다.

민주당은 총재제도를 없애고 근본적인 정당 혁신에 나서야 한다. 차기 주자를 선출하는 시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오늘날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기숙(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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