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평화적 인간

  • 입력 2001년 10월 22일 18시 28분


‘테러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기독교 신자다. 젊음을 술에 절어 보냈으나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로부터 감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다니기 위해 교회까지 침례교에서 감리교로 바꿨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식 때 감리교 목사 커비존을 초청해 기도를 하게 했고 9·11 테러 후 열린 추모예배 때도 그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부시 대통령이 믿는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가르치는 사랑의 종교다.

▷부시 대통령과 대결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신자다. 미국인 테러분석가가 쓴 전기에 따르면 빈 라덴은 수단에서 고단한 도피생활을 할 때도 기도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을 정도로 독실하다고 한다. 이슬람 신자들은 서구 사회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이슬람을 왜곡했다며 이슬람은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이슬람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성선설에서 출발해 인생을 낙천적 관용적으로 보기도 한다.

▷평화와 사랑의 종교를 신봉한다는 빈 라덴은 왜 극렬한 테러리스트가 됐을까. 또 부시대통령은 왜 집요한 무력 보복에 나섰을까. 부시 대통령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잔혹한 테러범들을 응징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빈 라덴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빈 라덴은 이슬람교도로서, 이슬람국가인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을 응징하고 이슬람의 본산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해 성전(지하드)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 또는 종교를 지키기 위해 대신 나섰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저서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이지만 사회는 그렇지 못해 인간이 비도덕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이 논리를 원용하면 평화적 인간인 부시 대통령과 빈 라덴은 평화적이지 않은 주변 여건 때문에 비평화적 행동을 하도록 강요됐다고 할 수 있다.

끝이 언제일지, 어디까지 확대될지 가늠하기 힘든 ‘테러와의 전쟁’의 가장 큰 피해는 이처럼 수많은 평화적 인간을 비평화적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될 것 같아 두렵다.

<방형남논설위원>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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