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여의도 웅변대회

  • 입력 2001년 6월 8일 18시 36분


여의도 의사당의 ‘웅변대회’는 내주 초 12일까지 이어진다. 여당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대(對)정부질문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고 우국충정을 불태운다. 백번 옳은 말씀인데, 들어보면 기실 귀기울일 만한 게 별로 없다. 다들 비통한 절규요, 웅혼한 사자후이지만 솔직히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가슴에 울림이 없다.

이번 임시국회도 5일 정당대표 연설이라는 이름의 ‘예포(禮砲)’로 스타트를 끊었다. 소리만 크고 실속은 텅 빈 총론(總論), 남(상대정당)탓만 있고 내탓은 찾아보기 어려운 호통과 탄식을 들어야 했다. 수차 반복되어온 ‘총체적 위기’ ‘민생 전념’ ‘국민 우선’ ‘정쟁 중단’같은 그럴 듯하지만 식상한 단어들.

이런 대표연설을 코미디라고 말한 인사가 있다. 바로 대표연설을 실연(實演)한 어떤 분이 그렇게 ‘자백’했다. 일년 내내 국회가 되풀이되는 판에 회기가 바뀐다고 새삼 정색을 하고 했던 소리 또 하고 반복하는 웅변대회. 지난번엔 총재가 했으니 다음엔 제2, 제3의 대표들이 줄줄이 나서서 표현만 고치고 바꾸어 읽는다. 이런 쇼가 월례행사처럼 이어지니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대표연설 대정부질문 필요한가▼

더 우스운 것은 그런 값싼 코미디로 귀한 의사일정 하루를 송두리째 까먹는 것이었다. 273명의 국회의원들이 몇십분짜리 3당 대표연설 듣는데 꼬박 사흘씩을 허비해온 것이다. 그분들끼리도 민망했던지 6월 임시국회부터는 하루에 세 당의 대표연설을 몰아서 듣기 시작했다.

대표연설이라는 예포가 멎으면, 이제 대(對)정부질문이라는 대포 발사가 시작된다. 7일부터 시작된 그 소리 또한 귀청만 아프고 남는 게 없다. 정치 통일외교안보 경제 사회문화로 나누어 판에 박은 웅변실력을 겨룬다. 의원과 비서진은 뭔가 새로운 원고를 만들어 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총무단 지시에다 당론을 반영하다 보면 모든 것이 정치타령 하나가 된다. 일년 내내 국회가 열리고, 날마다 정치성 대포를 쏘다 보니 새로운 메시지를 찾기조차 어렵다.

상임위원회라도 좀 실속이 있을까. 예포 대포 다 쏘았으니 소구경총으로, 실속있는 각론(各論)을 뒤지고 낱개의 정책 법안에 몰두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재탕 삼탕한 본회의의 정치성 질문과 공방은 상임위에서 ‘사탕 오탕’반복되고 백병전으로 치닫기 일쑤다. 심지어 예산 결산만 다루어야할 예결위도 정쟁 발언의 수라장만 같다. 예결위 발언의 7할이상이 정치공방이라는 것이 그 분들끼리의 탄식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는 그처럼 총리나 각부 장관을 세워 놓고 총론타령으로 지새거나 대정부 질문이라는 포격전만 벌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웃 일본의 의회는 어떤가. 일본도 추상적이고 구름잡는 선전전으로 정치공방만 일삼는 웅변대회는 아니다. 당수(정당대표)부터 의원들에 이르기까지 토론과 일문일답으로 정부측과 겨루는 토론대회다. 행정과 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히 포착해야 하고 순간순간 총리나 장관의 의표를 찔러 공세를 펼 수 있어야 한다.

▼토론 문답식 알맹이있는 심의를▼

여의도 ‘웅변대회’의 문제점을 3당 원내총무들도 알고 있다. 대표연설 대정부질문을 아예 없애거나 일년에 한두 차례로 정례화해야만 실질적인 정책심의와 입법, 예산결산 기능이 강화되리라는 것을 의원들이 깨닫고는 있다. 학계나 시민단체까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관성처럼 굴러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 국회의 낭비적 소모적 제도를 얼마나 빠르게 개선하느냐도 국가경쟁력의 문제다. 웅변대회 대신 토론과 문답으로 움직이는 국회로 만들어야 한다. 정쟁의 자리에 정책과 입법기능이 들어서야 한다. 우리 국회도 경쟁력을 가진 입법부로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6일 일본 의회, 몇 분(分)을 쪼개 쓰는 그들의 토론 열의가 인상적이었다. 당수토론의 야당당수들에게 할애된 시간은 총 40분. 거의 의석비례로 민주당 26분, 사민당 4분, 자유당 4분, 공산당 6분이었다. 그런데 사민 자유당은 민주당으로부터 1분씩을 구걸하다시피 해서 각각 5분씩 토론을 했다. 토론 1분을 벌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가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언제까지 늘어진 웅변대회로 소일할 텐가.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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