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희귀의약품 지정

  • 입력 2001년 4월 22일 18시 35분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0일 스위스 제약업체 노바티스사의 만성 골수백혈병 치료제 글리벡(Gleevec)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했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들이 하루 속히 이 약을 복용할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이 나지 않은 의약품을 국내에서 별도의 임상시험 없이 환자에게 쓰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식약청은 이날 한국희귀의약품센터 등지에 보낸 공문에서 “대통령비서실 등에 관련 환자들의 절실한 민원이 쏟아져 노바티스사가 국내 임상시험을 위해 스위스 본사에 요청한 약 전량을 희귀의약품으로 기증받아 환자들에게 쓰도록 했다”고 밝혔다. 150여명이 일단 이 약을 복용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는 60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할 예정이었다.

환자들은 식약청의 이례적으로 빠른 결정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식약청이 청와대의 ‘협조 요청’에 성급하게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민원처리인가?〓백혈병 환자들의 모임인 ‘새빛누리회’는 3월부터 청와대와 식약청 등지에 탄원서를 보냈다. 내용은 하루 빨리 임상시험을 허가해 달라는 것.

그러나 식약청은 노바티스사에 임상시험 허가 대신 희귀의약품 신청을 권고했고 20일 노바티스사가 신청서를 내자 20분 만에 허가했다. 식약청측은 “인도적 차원에서 환자들의 다급한 실정을 감안한 이례적 조치”라고 설명했다.

새빛누리회 이철환 사무국장은 “위급한 환자에게 빨리 이 약을 쓰게 한 데 대해 감사하며 이 약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계 우려〓만성 골수백혈병은 ‘만성기→가속기→급성기’로 진행되는데 급성기 환자 대부분은 3∼6개월 이내에 숨진다. 글리벡은 급성기에 효과적인 획기적 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너도나도 이 약을 고집하면 오히려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등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 약도 내성이 생길 수 있어 기존 치료법인 인터페론 주사요법이 효과가 없는 환자가 먹어야만 생명 연장에 효과가 있다. 서울 S병원에 입원 중인 이모씨(32)는 올 1월 미국 스탠퍼드대병원의 임상시험에 참여해 약 복용 한 달 만에 상태가 호전됐지만 최근 다시 증세가 악화됐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식약청에선 심사위원단을 구성, 엄밀한 절차를 통해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처방되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계에선 사후 조사가 필수적인 임상시험과 달리 엄밀한 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약을 투여할 경우 심사위원단 구성, 환자 선정 등 복잡한 문제가 있어 이 약이 정말로 필요한 환자들에게 적절하게 투여됐는지에 대해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전세계에서 시행되는 글리벡의 임상시험을 감독하고 있는 FDA 및 노바티스 본사측과 법적 문제가 생길 소지도 있다.

이 조치가 새 관례가 돼 다른 약도 외국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인정하면 임상시험 없이 쓰게 할 것인지 여부도 논란거리다. 더구나 인터페론 주사요법은 18년 이상 사용돼 왔지만 글리벡은 임상시험에 들어간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장기적으로 효과와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았다. 이 약의 한달 약값은 최소 100만원 이상이다.

▼글리벡이란▼

통상 ‘STI―571’로 불리며 99년말 미국 CNN방송 보도로 화제가 된 약. 이 약의 개발자인 오리건주립대 브라이언 드루퍼 교수는 당시 미국혈액학회에서 “인터페론 주사가 듣지 않는 만성 골수백혈병 환자에게 이 약을 복용시켰더니 95%의 혈액에서 암세포가 없어졌다”고 발표했다.국내에선 글리벡의 주 치료대상인 만성 골수백혈병 환자는 매년 400명 정도 발생한다. 15세 미만 백혈병의 5∼10%, 15세 이상의 20∼30% 정도. 이 병은 만성기→가속기→급속기로 진행된다. 이 약은 또 급성 림프구백혈병에도 사용된다.

글리벡은 백혈병 환자에게서 BCL―ABL이라는 유전자가 발견되는 경우 정상 세포는 공격하지 않고 이 유전자가 만드는 P210 단백질의 작용만 억제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제2의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부에선 P210 단백질이 발견되는 다른 암에 대한 임상시험이 진행중이다.

<이성주·윤상호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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