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커서핑]사대주의와국수주의 사이에서

  • 입력 2001년 4월 17일 20시 03분


지난 4월 11일 날씨가 갑자기 떨어지면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때 아디다스컵 2001 조별리그 네 경기가 벌여졌다. 그중 세 경기가 골든골이 나고, 두 경기장에서 펠레 스코어라고 하는 3 : 2 가 나고, 대전은 팀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가 뛰면서 놀랍게도 울산을 4 : 0으로 꺾었고, 정말 오랜만에 공중파 TV로 중계가 잡히는 등 많은 의미있는 일들이 있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신문들이 일제히 대서특필한 기사는 경기기사가 아니었다. 네 경기를 합한 경기기사보다 더 크게 잡은 기사는 전날 안양 vs. 포항전을 관전한 히딩크 감독의 한마디 - 한국 축구는 걸어 다니는 축구(Walking Game)다 - 였다.

물론 그 경기는 연장 후반전에서야 겨우 한 골이 나서 1 : 0으로 경기가 갈렸고, 양팀 모두 수비에 치중하면서 지루한 경기를 치룬 것도 사실이다. 히딩크 감독이 그런 얘기를 한 것 백분, 천분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한마디가 그렇게 큰 파장을 끼칠 말이었는가는 의문이 남는다. 그의 한마디는 한국 축구 모두를 평가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 한 경기에 대한 평가였을까? 과연 히딩크 감독의 한마디에 이토록 호들갑 떨 이유가 있었는가 말이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스포츠신문에 묘한 기사가 하나 더 나왔다. '한국 축구 비하 발언 의혹 증폭' 이라는 매우 선정성 짙은 제목을 단 이 기사는 처음에는 히딩크 감독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한 나라 축구의 최고봉이라는 프로무대를 벽안의 이방인이 세치 혀로 무참히 찢어발겨놓다니' 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 가면서 '감히 어디서 외국인이 엥길려고 하는냐' 라는 국수주의적인 폐쇄성을 그대로 내보였다.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들을 예로 든 이유는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고 싶은 사대주의와 국수주의에 대한 아주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사대주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한국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스포츠 역시 사대주의가 매우 팽배해 있다. 외국에서 하면 모두 좋은 거고 대단한 거라는 인식이 워낙 넓게 깔려있기 때문에 (사실 그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 외국이라는 말 한마디에 껌뻑 죽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도 '외국에서는 다 그러는데요?'라는 말 한마디면 모두 프리패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국내의 한 축구인이 '한국 축구는 이래서 안 된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대뜸 '국내 실정을 무시한 발상'이라는 반발이 나올 것이다. '니가 뭔데 떠드느냐'는 핀잔과 함께. 하지만 외국의 누군가가 '한국 축구는 이래서 안 된다.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똑같은 얘기를 하면 '맞어. 맞는 말이야. 역시 외국에서 하는 얘기는 옳은 얘기뿐이야' 라는 반응이 나온다. 조금 과장된 표현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실례도 있지 않은가? 조금 다른 '사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난 98 월드컵 때 차범근 감독의 대표선수들 복장통일과 통제를 보고 '군대 사관학교식' 이라며 비난했던 사람들이 히딩크 감독의 복장통일과 통제를 보고는 '카리스마적 지휘' 라며 칭찬했던 일은 그 한 예일 뿐이다.

두번째 국수주의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앞의 사대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인데, 똑같이 옳은 이야기인데도 우리 내에서 얘기하는 건 상관없지만 외부에서 얘기를 하는 것은 못참는 주의이다. 끼리끼리만 모여서 꿍짝대는 것이 좋지 외부의 간섭을 받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다. 이번 히딩크 감독의 발언에 대한 기사를 보자. 기사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벽안의 외국인이 ~' 라는 표현이다. 그 소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외국인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게 맘에 안 든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자기들은 그런 소리를 해도 되지만, 히딩크 감독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풍토때문에 축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를 다 통털어서도 제대로 한국에서 뿌리내린 외국인 지도자가 여태껏 한명도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프로축구사상 최초의 피지컬 코치였던 울산의 재일교포 윤태조 코치 역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선진 문물과 선진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쳐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런 사대주의와 국수주의. 양쪽 극단에 있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잘못된 사상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 축구판에서 이 두 가지 사상이 모두 다 섞여서 나오는 이유는 의외로 한가지로 귀결시킬 수 있다. 바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니 무조건 외국은 옳다 하고 주체 없이 수용하려고만 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하는 말에 과민반응하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스스로의 주체를 세우고 외국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을 때, 사대주의도 아니고 국수주의도 아닌 합리적인 중용의 도(中庸의 道)를 지키면서 옳은 것, 발전적인 것은 배우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NO'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제공:후추닷컴(http://www.hooc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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