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민웅/언론 실정비판 정부에 약

  • 입력 2001년 4월 3일 18시 36분


나라가 몹시 어지럽다. 의료보험 재정의 파탄, 대량 실업, 경제 불안, 공교육의 황폐화, 외교 망신 등 어느 한곳 성한 곳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열등감의 방어 메커니즘이 표출된 것으로 보이는 오기(傲氣)의 정치가 나라를 분열과 대립과 반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이를 보도, 논평하는 언론과 정부의 관계도 어지럽게 뒤틀리고 있다.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언론의 비판에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언론 개혁에 관해 한 마디 하자, 몇몇 신문과 방송은 정부를 가장 많이 비판해 온 동아, 조선, 중앙을 싸잡아 공격하면서 이들 3개 신문의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참으로 희한한 대리전이다.

▼權-言 긴장관계 공익에 도움▼

공격의 성격도 언론간의 건전한 상호 비판의 범주를 분명히 벗어나고 있다. 내가 3개 신문을 변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건전한 상호 비판이 되려면 먼저 이들 3개 신문의 기사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하여 공정하게 보도했는가를 문제삼아야 한다. 보도 내용과 직접 관련 없는 문제를 들추어내어 ‘조폭(組暴)’이니 하고 공격해서는 본말이 뒤집힌 것이다. 그러니 그 의도와 동기를 의심받고 권력의 ‘홍위병’이니 하는 모욕적인 반발도 받는다.

왜 이렇게 치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참으로 답답하다. 언론의 으뜸가는 임무가 무엇인가. 사회적 물리적 환경 감시, 특히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이 아닌가. 한국처럼 삼권분립이 제대로 안 돼 권력간의 상호 견제가 부실한 사회일수록 언론의 권력 감시와 비판은 더 필요한데도 말이다.

언론의 규범적 역할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민주 사회에서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그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속성상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다. 숙의(熟議)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있는 것이 오히려 공익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 그리고 언론의 건전한 비판은 정부에도 도움이 된다.

한번 따져보자. 우리의 사회적 조건을 감안하여 의약분업을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 반개혁으로 매도하고, 남북관계와 관련해 일정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면 반통일, 반민족으로 몰아붙인 대서야 어떻게 품격 있는 토론과 비판 문화가 정착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 의료보험 재정이 파산 직전에 이르자 마침내 정부도 의약분업의 졸속 추진을 인정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최근 방미 중에 남북문제의 ‘포괄적 상호주의’를 스스로 수용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해 역대 정권 가운데 집권 초기에 개혁과 쇄신과 민주를 부르짖지 않은 정권은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김대중 정권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 반민주가 되고 반개혁이 되는가? 공공 정책에 관한 토론은 다양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놓고 벌이는 진정한 선택에 관한 토론이 되어야 한다. 이분법적 양자택일 식 토론이 돼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반민주, 반개혁으로 몰아붙인다면 그거야말로 반민주고 반개혁이 아닌가.

먼저 정부는 민주사회에서 언론이 담당한 임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정책당국자들은 그들의 정책 아이디어가 언론의 검증을 거침으로써 더 다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언론의 비판적 역할에 좀 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옳은 비판을 수용하여 일을 잘할 생각을 해야지 말 분식(粉飾)을 통해 잘못을 호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건 모든 정권에 다 해당된다.

▼의견 다르면 反개혁인가▼

다음으로 언론은 임무의 우선 순위를 잘 가려야 한다. 언론의 의미가 무엇인가? 언론, 즉 ‘저널리즘(journalism)’이라는 용어는 1830년대 서구에서 대중신문 시대가 열림에 따라 신문이 그 동안의 후견자였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여 권력을 비판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비로소 영어사전에 등재된 신조어였다. 즉,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는 신문 방송은 언론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최근 언론과 정부 사이의 긴장 고조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새로운 언론 통제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매우 교묘하고 음성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률적 권한을 교묘하게 편파적으로 행사하는가 하면 갖가지 권력 자원을 동원하여 언론의 비판을 잠재우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를 감시하고 저항하는 것은 언론을 자처하는 신문 방송이라면 그들의 우선적인 임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민웅(한양대 교수·언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