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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30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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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官) 주도였던 한국 경제발전과정에서 경제부총리는 경제의 일선사령관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권한의 차이는 있었지만 카리스마와 각종 일화로 지금까지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 적지 않다.
경제부총리제가 생긴 것은 64년5월.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장기영(張基榮)씨를 초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김영삼(金泳三)정부 때인 94년12월 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해 재정경제원이 발족한 뒤에는 부총리겸 재경원장관으로 불렸다. 외환위기 이후 마지막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임창열(林昌烈)씨까지 모두 24명이 경제부총리를 거쳐갔다.
경제관료들은 대체로 장기영(64년5월∼67년10월) 김학렬(金鶴烈·69년6월∼72년1월) 남덕우(南悳祐·74년9월∼78년12월)씨 등 세 사람을 기억에 많이 남는 부총리로 꼽는다.
장부총리와 김부총리는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및 포항제철 비료공장 건설과 외자도입, 성장정책을 통해 우리 경제의 발전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부총리는 중화학공업 육성과 과감한 수출드라이브정책을 통해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성숙시킨 공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박정희시대에 부총리로 일했고 비교적 ‘장수 부총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쓰루’(鶴의 일본어식 발음)라고 불렸던 김학렬 부총리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직선적 성격이었던 그는 부하직원들에게 육두문자를 써가며 질책했다. 부총리실에서 혹독하게 꾸중을 당한 뒤 얼이 빠져버린 한 중간간부가 집무실을 나간다는 것이 잘못해 캐비닛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있다.
전두환(全斗煥)정부시절 두 차례 경제부총리를 지낸 신병현(申秉鉉)씨는 전형적인 ‘외유내강’ 스타일로 김재익(金在益)경제수석과 호흡을 맞춰 경제안정화시책을 밀고 나갔다.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노태우(盧泰愚)정부시절인 88년12월∼90년3월에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趙淳)씨. 성실성과 비전을 갖췄고 외부압력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정책추진력이 약하고 현실감각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영삼정부 후반부에 경제부총리를 지낸 강경식(姜慶植)씨는 외환위기 책임 때문에 현정부 출범후 한때 구속됐다가 무죄판결로 풀려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권순활기자>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