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때론 ‘양비론’이 그립다

  • 입력 2000년 12월 25일 18시 18분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이따금 나는 ‘양비론’이 그립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정말 해야할 말은 못하고 이쪽 저쪽 주장이 다 잘못됐거나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던 행태를 지식인들은 양비론이라고 꼬집었다. 권력의 잘못엔 옹골찬 비판도 못하면서 비권력측의 흠은 여지없이 들춰내고, 고작 말끄트머리에 ‘잘못은 너나없이 모두에게 있다’고 뭉뚱그려 판정하는 사람을 그땐 양비론자라고 불렀다.

유신과 5공정권을 겪는 동안 그 폐해는 극명했다. 정권에 줄선 언론은 교묘한 양비론으로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외침과 행동은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는 불법 선동’으로 다그쳤다. 체육관 선거를 비판하면 ‘실정법의 준수’라는 근엄한 잣대를 들이댔다. 국회가 공전하면 타협하지 않는다고 야당에 매를 때렸고 여당엔 고작 ‘어른다운 자세’만 주문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됐는지 모두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양비논리를 사족처럼 붙였다.

▼암울했던 시대의 비굴한 수법▼

힘있는 쪽은 타이르는 척하며 힘없는 쪽은 뺨을 때리던 그런 논리가 양편 주장이 다 일리 있어 시비를 가리기 힘들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와 함께 춤추며 발전했다. 어둡던 시절 말깨나 하던 사람들은 이런 행태를 비웃었지만 자신조차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이 무서워 정작 해야 할 말은 안으로 삭이고, 그래도 작은 양심으로 은유적이나마 비판하려면 양비론을 내미는 게 제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양비론이 그립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망발인가. 어쩌자고 암울한 시기에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써먹던 유물을 끄집어내 그립다는 둥 스스로 욕먹을 일을 골라서 하고 있는가. 그 시절 온갖 논리를 들먹이며 절대권력에 힘을 실어주던 사람들도 이제는 바뀌어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린다고 할말을 하겠다고 나서는데 왜 느닷없이 양비론을 되새김질한다는 말인가.

요즘 세상이, 사람들이 너무 한쪽으로 쏠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편협하다 못해 증오에 찬 자기주장들이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 버젓이 자리잡았다. 반대의견은 철저히 짓밟는 대립의 날을 세우고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있다. 선과 악, 좋고 싫음, 내편 네편을 미리 정해놓고 상대측의 어떤 주장이나 행동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우리 사회 일부의 행태가 이젠 고형화한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정치를 봐도, 경제를 봐도, 지역을 봐도, 모두가 편가르기에 함몰돼 있다. 내편이 아니면 상대측이 어떤 얘기를 하든 일단 비난부터 해야 직성이 풀린다. 여당은 야당을 ‘대권에 눈이 멀어 대국을 보지 못한다’고 경원시하고 야당은 여당을 ‘나라 망치는 일만 골라서 한다’고 윽박지른다.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 조금 양보함으로써 원만한 타협점을 찾아보자는 자세는 실종된 지 오래다. 이러고도 말처럼 ‘상생의 정치’를 한다면 그건 기적이다.

지역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동쪽과 서쪽 사이에는 강과 산보다 더욱 깊고 높은 장벽이 쳐졌다.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곧은 사람들의 노력은 파당적 정치의 맛에 빠진 이들의 장난에 힘을 못쓴다. 인사와 지역경제, 개발의 문제들이 끝없는 정쟁의 도구가 되었고 치졸한 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일도 생겼다. 양식과 이해 대신 분노와 질시가 차고앉아 지역민들의 거리를 더욱 멀게 하고 있다.

▼'그냥 싫으니까'반대위한 반대▼

2000년 한해 동안 일어났던 많은 사건과 정책들도 무조건 편가르기의 대상이 되었다. 남북대화, 의료보험, 구조조정의 문제들은 내편이 어떤 주장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장래를 위해 치밀하게 따져보고 판단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이유 없이, 그냥 싫으니까’ 식의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벨상 수상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강요당해 마지못해 빌려쓰던 ‘양비론’이 그리운 건 아니다. 내 편은 다 옳고 상대는 모두 틀려먹었다는 무조건적인 파당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비판할 건 하고 칭찬할 땐 하자는 얘기다. 진정 가야 할 길이라면 적이 그 길을 가더라도 뒤를 따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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